신앙의 자유가 없는 박해의 시기.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이 땅을 찾아왔지만, 사제의 수는 극히 부족했다. 그렇기에 온갖 수난과 역경 속에서도 사제양성의 꿈은 식지 않았다. 충북 제천의 배론에 세워진 성요셉신학교가 유명하지만, 교구 땅에도 사제 양성의 못자리가 자리했었다.
바로 경기 여주 강천면 부평리 581의 부엉골 신학교 터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부엉골에는 호랑이와 부엉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범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외진 산골이다.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여전히 부엉골은 산 속에 숨겨져 찾아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부평리에 다다라 섬강을 따라 세종천문대 방향을 향한다. 세종천문대부터는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다. 이 길을 따라 계곡까지 1㎞가량을 가고, 계곡이 나오면 다시 계곡을 따라 1㎞ 올라간 곳이 부엉골의 신학교 자리다.
원래 부엉골에는 교우촌이 있었다. 박해시기에 신자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생긴 교우촌이었다. 로베르(Robert) 신부가 경기·강원 지역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중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의명으로 신학교 건립을 준비하면서 1885년 이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다. 1855년 설립된 배론의 성요셉신학교가 병인박해로 폐쇄된 지 20여 년만의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신학생들을 선발해 말레이시아 페낭섬의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로 보냈다. 하지만 1822~1844년까지 페낭신학교에서 공부한 신학생 21명 중 사제품을 받은 것은 10명뿐이었다. 신학생들이 낯선 페낭의 기후와 풍토를 이겨내지 못하고 귀국했던 것이 원인 중 하나였다. 이에 국내 신학교 설립을 서두르게 됐다.
계곡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다보니 무덤과 널찍한 터가 나타났다. 아마도 집이 몇 채 있었던 곳인 듯 희미하게 집터의 흔적이 보였다. 부엉골의 사람들이 살던 터인 듯했다.
부엉골의 교우촌은 1894년 본당으로 승격됐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충주 음성의 감곡본당으로 이전했다. 본당 설립 당시 부엉골에는 92명의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본당은 22개 공소에 1200여 명의 신자를 관할하는 큰 규모였다. 깊은 산골인 만큼 은신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지만, 본당이 있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본당이 이전하고 부엉골의 신자들은 다른 공소나 지역으로 이주했고, 1900년대 초반에 부엉골공소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마을 터를 지나 길을 오르자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지금은 사람도 없고, 특별히 관리하지도 않는 듯 했지만,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흔적이었다. 이 허름한 집이 신학교 터를 찾아가는 유일한 이정표다. 집을 지나 200m 떨어진 계곡 인근이 신학교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지점이다.
부엉골본당 주임이었던 가밀로(Camile Bouilon) 신부는 “로베르 신부는 오직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살고 있는 이 험난한 산 속의 마을 부엉골보다 더 나은 장소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기 전까지, 사제로 양성하는 신학생들은 가장 깊숙한 곳에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가밀로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사제들과 신자들이 근처의 숲에서 통나무를 베고 진흙 벽돌을 쌓아 초가집을 지어 신학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신학교 초대 교장인 마라발(Maravel) 신부는 부엉골의 신학교를 ‘예수성심신학교’라고 명명했다. 신학교에서는 페낭신학교에서 귀국한 신학생 4명과 국내에서 입학한 신학생 3명, 총 7명이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환경은 열악했다.
신학교 건물은 성당이자 공부방, 식당, 침실을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제관도 길이 3m, 너비 2.5m에 불과한 좁은 방에, 높이도 1.7m밖에 되지 않았다. 사제관은 신학교 건물 뒤에 가려지도록 지어졌는데, 위급할 때에 신부가 숨거나 산 위로 도망가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열악한 환경 탓에 콜레라로 신학생 1명과 한문교사 1명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때문에 신학교는 설립한 지 2년 만에 이전하게 된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열악한 산 속보다 도시로 옮기는 것이 신학교 운영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찾아간 신학교 터에서는 이곳에 신학교가 있었다고 할 만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신학교가 폐쇄된 지도 이미 130년 가량 지났으니 오히려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부엉골의 신학교는 1887년 서울 용산(현 서울성심여자고등학교 자리)으로 이전했다. 용산 신학교는 ‘용산 신학교 학생 명부’(Liste des eleves du Seminaire de Ryong San)에 ‘부엉골’을 표기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기원을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로 기록하고 있다.
신학교는 다시 1945년 서울 혜화동으로 이전해 지금의 가톨릭대학교로 이어지면서 그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제들을 탄생시켰다.
비록 부엉골 신학교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이곳은 신앙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소를 키우던 한국교회의 역사가 담긴 땅이다. 숲만이 우거져있는 신학교의 터에 서서 신앙선조들의 삶을 기억하고 성소를 위한 기도를 바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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