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부는 지난해 6월 파병에 나서기 전 “파병은 곧 선교라는 생각으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승조원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지난해 6월 23일 부산 해군작전사령부에서 출항한 바로 다음날이 수요 종교행사 날이었다. 미사 장소는 장교들의 휴식 공간인 사관실로 25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이크로 첫 종교행사 안내 방송을 하고 긴장 속에 미사 드리러 올 장병들을 기다렸다. 첫 미사에 나온 장병은 딱 4명. 첫 미사 후 목표를 세웠다. ‘임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때는 사관실을 가득 채우리라.’ 결국 그 목표는 ‘초과 달성’ 했다. 소말리아 해역에서 한국으로 귀환하는 동안 30여 명의 장병이 미사에 참례했다.
▲ 지난해 6월 19일 청해부대 제19진 충무공이순신함 장병들을 위한 환송미사 후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앞줄 가운데), 김광수 신부(유 주교 왼쪽) 등 관계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김 신부는 사실 지난해 6월 군종교구 임관 동기 신부들과 전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해군 군종신부 맏형인 서하기 신부(해군본부)가 “복무를 2년 연장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청해부대 파병 때문이었다. 전역을 앞두고 받은 제안이었지만 망설임 없이 “네”라고 답했다. 해군과 해병대에서 사목하며 장병들과 정이 깊이 들어 복무를 연장하는 것도 마음 한 켠에 소망으로 자리하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충무공이순신함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부산에서 출발해 청해부대 제18진 왕건함과 인수인계 장소인 아랍에미리트에 도착하는데 걸린 23일은 장병들이 김 신부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준 기간이었다. 해가 진 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망망대해를 운항하는 장병들이 대단해 보였다. 함정 구조를 알지 못해 복잡한 격실을 찾기 힘들어 하는 그의 손을 잡고 안내해 주는 장병들도 있었다.
김 신부는 출항 보름이 지나자 점심은 장교식당에서, 저녁은 병사식당에서 먹겠다고 함장 유재만 대령에게 건의해 승낙을 받았다. 전체 승조원 300여 명 중 절반을 차지하는 병사들이 가장 큰 사목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함정생활이 한 달 정도 된 시점부터는 본격적으로 함정 곳곳을 찾아다니며 위문과 사목을 할 수 있었다. 먼저 천주교 신자라고 신분을 드러내지 않던 장병들이 김 신부가 다가가 “미사에 오세요”라고 권유하면 “제가 냉담하고 있었어요”라거나 “저도 세례 받은 신자입니다”라고 속내를 보여줬다.
파병기간 6개월 동안 수요일 미사에서 교리교육도 실시해 매월 첫째 주일미사마다 세례식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5명이 세례를 받았다. 5명이 적게 보일 수 있지만 한정된 인원과 기간을 고려하면 의미 있는 결실이다. 해군이나 해병대 장병들은 군종신부가 없는 함상에서 군복무 할 여지가 크다는 점을 감안해 공소예절과 기도 진행방법도 수요 종교행사에서 교육했다.
다른 악기가 없어 기타로 미사 반주를 직접 맡은 것도 김 신부였다. 그는 “신학교 다니면서 동기들과 반주자가 없는 장소에서 사목하게 될지 모르니까 기타는 배워두자고 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기타 실력을 활용했다”고 웃음지었다.
고국의 가족에게서 들려오는 힘겨운 소식을 접한 승조원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함장에게 배려를 요청하는 것도 김 신부의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지난해 7월 중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도착했을 때는 기온이 섭씨 44도까지 올라 한국에서 겪어 보지 못한 더위에 힘겨워하는 승조원들이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도록 함장에게 건의한 적도 있다. 평생 잊지 못할 시원한 맥주 이상으로 승조원들은 김 신부를 잊지 못한다.
정해진 임무 이외에 해적 출현 신고로 승조원들이 전투배치 되거나 지나가는 상선에서 응급환자 이송 요청이 접수돼 의료진이 움직일 때도 김 신부는 실제 상황에 투입되는 승조원들에게 안수와 기도를 해줬다.
김 신부는 “청해부대 모든 장병들은 40도가 넘는 무더위를 이겨내고 정말 열심히 자기 임무를 수행하며 국위선양을 했다는 사실을 신자들과 국민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