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중국 하얼빈시 하얼빈역. 기적을 울리며 기차 한 대가 들어왔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고 고종을 퇴위시킨 원흉, 조선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의기양양하게 열차에서 내렸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 젊은이가 브라우닝 권총을 겨눴다. 탕, 탕, 탕. 3발의 총성이 울리고 일본 제국주의 심장이 쓰러졌다. 젊은이는 옆에 있던 일본 관리들을 향해 3발을 더 발사했다. “코레아 후라!(대한국 만세!)”를 외쳤다.
세례명 ‘도마(Thomas)’. 가톨릭 신자인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장엄한 최후를 맞을 때까지 투철한 신앙심과 민족정신을 결코 잃지 않았다.
경천, 하늘을 우러러보라
2016년 1월 12일 대구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이기수 신부) 중국 순례단이 찾은 중국 하얼빈시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 의거를 후대에 길이 남기기로 한 중국 당국이 비밀리에 지난 2014년 하얼빈역 1번 플랫폼 앞 귀빈용 대합실을 개조해 만들었다.
안중근 의사 흉상과 사진,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기념관을 둘러보던 순례단이 시선을 멈추고 한참 동안 숙연해졌다. 기념관 안쪽 창문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일어난 하얼빈역 플랫폼 현장을 바로 볼 수 있었다. 현장 위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라고 중국어로 적힌 간판이 설치돼 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의 대표적인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19세 되던 때 개화사상을 가진 아버지(안태훈)는 파리외방전교회 홍석구(J. Wihelm)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안중근 의사도 이 때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귀의하게 된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천주교교리문답」 등 100권이 넘는 교리서적을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눠줬다. “천주교야말로 참 종교요, 가르치는 교리야말로 우리가 믿을 참 진리다”라며 전교활동을 펼쳤고 마을 곳곳에서 신앙운동이 일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은 안중근 의사는 32세의 나이로 뤼순감옥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투철한 신앙심을 실천했다. 신부로부터 열심히 교리를 배우고 복사로 활동, 황해도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활동에 헌신했다. 고향을 사목 방문한 주교를 멀리 해주까지 수행하기도 했다.
그의 신앙심은 감옥에 투옥됐을 때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평한히 하옵기를 천만 번 바라올 뿐이옵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아들 분도가 장차 신부가 되게 해달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자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중국 다롄시 뤼순관동법원을 방문한 순례단은 그가 남긴 휘호를 통해 가톨릭 신앙심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경천(敬天)’. 하늘을 우러러보라는 것으로, 이 짧은 휘호에서 천주교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느껴졌다. 옆에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짧은 그의 손도장이 찍혀있다. 단지동맹(斷指同盟)으로 민족 혼과 신앙심을 고취시키려 했던 그의 노력이 절실하게 나타난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평가는 그동안 엇갈렸다. 의거 이후 교회는 그가 ‘살인범’이라며 신자 자격을 박탈했다. 80여 년이 지난 1995년에 와서야 그를 신자로 복권시켰다. 현재 안중근 의사 업적에 대한 한국교회의 재평가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중국에서 평화를 기도하다
대구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이기수 신부) 중국 순례단은 이번 중국 하얼빈, 다롄 순례를 통해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각지 성당에서 정성스럽게 봉헌했다.
순례단은 1월 11일 오후 중국 하얼빈시 조선족 성당인 헤이룽장교구 성모성심성당(주임 이용철 신부)을 찾았다. 이기수 신부는 강론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삶은 세례 전과 세례 후로 나눠볼 수 있다”며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게 한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1월 14일에는 한인 성당인 중국 다롄시 다롄시천주교회(주임 유재걸 신부)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 곳에서 순례단은 안중근 의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을 말했던 것을 되새겨봤다.
순례에 참가한 김경수(플라도·포항 이동본당)씨는 “실제 현장을 보니 안중근 의사가 정말 진정한 신앙인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됐다”며 “앞으로 젊은 신자들이 더 많이 현장을 찾아 우리 역사와 신앙의 관계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기수 신부는 “안중근 의사 의거는 신앙심과 민족의식이 하나로 결합돼 이뤄진 것”이라며 “이번 순례를 계기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됐던 안중근 의사의 신앙심을 재조명하는 발판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감회를 밝혔다.
■ 잔혹한 역사의 현장, 뤼순감옥과 731부대 유적지
“동양평화, 모두 함께 삼창하자”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중국 다롄시 뤼순감옥 사형장.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그는 한치의 떨림도 없이 입을 열었다. “나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했다. 여기 있는 모두 나와 함께 동양평화를 삼창하지 않겠는가?”
뤼순감옥을 찾은 대구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중국 순례단은 중국 측의 특별한 배려로 안중근 의사 사형장을 직접 둘러볼 수 있었다. 교수형이 집행되는 곳은 오른쪽 사형장 입구를 지나 불과 몇 발걸음. 그 순간 그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가지고 있던 신앙심, 민족에 대한 사랑, 평화를 갈구하는 젊은이의 열정이 그의 온 몸을 감싸고 있었을 터다.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의 힘으로 동양평화를 외친 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뤼순감옥 현장을 둘러보던 순례단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2000여 명을 수용하는 규모의 감옥은 감방과 고문실, 사형장으로 이뤄져 있다. 안중근 의사를 포함해 신채호, 이회영 등 조선 독립투사들이 투옥돼 갖은 옥고를 치렀다.
하얼빈 731부대 유적지에서는 ‘마루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의 잔혹한 생체실험에 희생된 독립투사들과 일반인들의 아픔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일본군은 겨울철 영하 30℃를 넘나드는 야외에 사람을 세워두고 동상(凍傷) 실험을 했다. 사람을 산 채로 해부했다.
이 시대,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순례단은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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