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 역사상 유래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교회가 명실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이기수 신부) 중국 순례단은 젊은 김대건 신부가 조선 복음화의 꿈을 키웠던 옛 만주 땅을 찾아 그 숭고한 뜻을 기렸다.
지난 1월 12일 오후, 순례단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시(長春市)에서 약 30㎞ 거리에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Xiaobajiazi) 마을로 향했다. 소팔가자는 1844년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은 곳이다.
버스를 탄 순례단 일행이 마을에 거의 다다를 즈음, 약 10㎞ 길이 왕복 2차선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김대건로(金大建路)’라고 명명된 도로다. 이 곳을 찾는 신자들의 순례길에 의미를 더하자는 서울대교구 신자들의 뜻이 밑거름이 돼 지난 1999년 4개월여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당국은 도로 등에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김대건로’의 경우 특별히 허락했다고 한다. 인민정부 측에서 도로 공사비용을 대기도 했다. 김대건로 완공은 한국과 중국 천주교 상호교류에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대건로를 지나는 길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늦은 시간.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큰 가로수 사이로 비친 저녁 햇살이 순례단이 탄 버스를 평온하게 감쌌다.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순례단에게 한국교회 근원을 찾는 축복의 순간이었다.
순례단 버스가 도착한 소팔가자는 여전히 나무와 석탄으로 난방을 하는 전형적인 중국 시골 마을이다. 여덟 가구가 모여 한 마을을 이뤘다는 뜻의 소팔가자는 중국의 전통적인 교우촌이다. 2600여 명의 마을 사람들 중 무려 95%가 가톨릭 신자다.
1796년 교우촌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소팔가자는 1838년 랴오둥(遼東)대목구(代牧區)가 베이징(北京)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했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이자 만주(滿洲)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Verolles) 주교가 1841년 소팔가자 일대 토지를 매입하고 성당을 건립했다.
소팔가자는 만주 전교의 거점이었다. 또 그 때문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김대건 신부가 이 곳에 거처하며 부제품을 받을 수 있었다.
순례단 버스가 소팔가자 마을에 도착하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새로 짓고 있는 소팔가자 성당의 모습이었다. 지난해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올해 말 완공될 예정인 성당은 1000명을 수용 가능할 정도로 큰 규모다. 인구 2600여 명의 작은 마을에 이처럼 대규모의 성당이 들어설 수 있는 것도 소팔가자가 가톨릭 성지로서 중국 내에서 갖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공사가 한창인 성당 뒤쪽으로 김대건 신부가 거처했던 곳에 세워진 ‘김대건 기념관’이 보였다. 5층에 연면적 약 8200㎡의 현대식 건물이다. 지난 2003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중국 소팔가자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이하 성역화 추진위)’가 완공했다. 1~3층은 양로원, 4층은 피정센터, 5층은 성 김대건 박물관으로 꾸며졌다.
기념관 앞 쪽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이 서 있다. 성역화 추진위가 지난 1998년 건립한 것으로, 고(故) 김세중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의 작품이다. 김대건 신부 동상은 갓과 두루마기 차림으로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은 앞을 향하고 있다. 왼손에 든 성경은 자신의 심장 가까운 곳에 있다. 조선 복음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일념이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져온다.
김대건 기념관 5층 박물관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품과 기념물이 전시돼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솔뫼에서 순교 성인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슬하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 신부는 1836년(헌종 2년)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예비 신학생 3명 중 1명으로 선발돼 상경했다. 당시 신학생으로 함께 선발된 이들은 최양업(토마스) 신부와 최방제(프란치스코)였다.
중국어를 배운 뒤 모방 신부 소개장을 품에 지니고 중국으로 건너간 이들 10대 소년들은 1837년 중국 대륙을 횡단해 마카오에 도착했다. 1842년까지 5년간 파리외방선교회 극동대표부에 임시로 설치된 신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순탄치 않았다.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을 피하기 위해 마카오에서 필리핀 마닐라를 여러 번 왕복해야 했고 동창 최방제는 숨지기도 했다.
1842년 11월 최양업 신부가 먼저 소팔가자로 향했다. 이듬해인 1843년 3월 김대건 신부도 소팔가자에 도착해 최양업 신부와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1844년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신학 과정을 모두 끝내고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삭발례를 비롯해 부제품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직 만 24세가 되지 못해 사제 서품을 받지는 못했다.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조선에 밀입국을 시도한 김대건 신부는 1845년(헌종 11년)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한양에 잠입한다.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인 김대건 신부는 다시 파리외방전교회에 지원 요청을 위해 쪽배를 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만 24세를 맞이한 김대건 신부는 드디어 사제로 서품됐다. 그 뒤 바로 배를 타고 충청도 땅에 상륙한 그는 선교사 입국과 비밀항로 개설을 위해 노력하다 체포되고 만다.
6차례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26세로 순교한 그는 1857년(철종 8년) 교황청에 의해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됐다. 1925년에는 교황청에서 시복돼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시 시성돼 성인위(聖人位)에 올랐다. 순례단은 김대건 기념관을 둘러보며 그의 숭고한 넋 앞에 숙연해졌다. 순례단은 이어 기념관 4층 피정센터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기수 신부는 강론을 통해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 성인”이라며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산 것은 13개월에 불과했지만 그분의 삶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은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선교가 활발했던 중국 땅에서 조선 선교의 꿈을 꾸셨던 김대건 신부는 현재 한국교회가 중국교회를 도와주는 모습을 상상도 못하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순례단은 지린(吉林)교구 소팔가자본당 팡시펑(庬喜埄) 주임신부와 만날 수 있었다. 팡 신부는 “소팔가자 주민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통해 한국과의 인연을 수백 년 동안 이어왔고 한국인에 대한 사랑도 매우 깊다”고 전했다.
다음날인 1월 13일 지린(吉林)교구 창춘시천주교회(長春市天主敎會, 주임 왕쇼우슌(王守順) 신부)에서 집전된 미사에서도 순례단은 고향을 떠나 한민족 복음화를 위해 노력한 젊은 사제들을 기렸다. 이 신부는 “젊음의 열정으로 진리를 찾는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며 “오늘날 교회 역시 젊어져야 하며, 이 시대에 김대건 신부와 같은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하자”고 강론을 통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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