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성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39년 기해박해 이전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울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 성녀 조증이(바르바라)의 친정집이 이천의 ‘금재’라고 전해지는데, ‘금재’를 현재 설성면 금당리로 추측하고 있다. 성녀 조증이의 남편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도 금재로 피신했다가 밀고로 잡혀 순교했다.
반월성 지역의 교우촌이 기록에 뚜렷이 등장한 것은 1896년 감곡본당의 부이용 신부가 감리 부락을 방문해 판공성사를 집행한 기록이다. 신자들은 마을에서 옹기점을 운영했지만, 생활고로 사람들이 떠났고 소수의 신자들만이 이 땅을 지켜왔다.
지속적인 전교활동으로 1950년대부터는 신자들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1932년 설립된 새붓공소는 팔계·암산리·능골공소 등을 차례로 분가시켰고, 6·25전쟁 이후에는 연평균 100~200명의 입교자가 생겼다. 이런 기하급수적인 신자 증가로 본당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성당을 세울 땅을 마련한 본당은 감곡본당의 옛 성당 자재를 가져와 기와집 강당을 만들었다. 마침내 1958년 본당이 설립됐다. 본당이 설립됐지만 아직 공소공동체의 모습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1960년대부터는 이농현상이 시작돼 점차 신자 수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을 깊이 이해하는 본당 사제들의 활동으로 본당은 친교로 뭉친 공동체로 발전했다. 신자 재교육과 체육대회 등을 끊임없이 열어 공동체의 단합을 촉진시켰다. 농한기를 이용한 집중교리는 예비신자 증가에 힘을 실었다. 레지오 마리애 등 신심단체의 활동은 친교와 더불어 영성적 성장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본당은 인구 자체가 적은 농촌지역임에도 신자 수 2000명이 넘는 규모로 성장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이농현상과 고령화로 현재 본당 신자 수는 850명 가량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본당은 여전히 공동체의 단합과 깊은 신앙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본당은 지난해 신자들이 직접 키운 가축과 작물을 판매해 마련한 돈으로 새 성당을 봉헌하기도 했다.
▲ 성당에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사도 베드로 동상.
▲ 성당에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사도 바오로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