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제가 국악성가 하는 신부로 나름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원래 저는 피정을 지도하는 신부였어요. 피정지도에서 국악성가로 제 팔자가 바뀌게 된 것은 한 자매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어요. 저는 그분과의 만남을 ‘운명적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안배하심이었지요. 그 과정은 이렇게 전개됐습니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올 때 저는 음악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수도원 입회를 결정하는 피정 중에 당시 원장님이었던 박도세 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거든요.
“바오로 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전공했는데 이제 수도원에 들어오면 음악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기꺼이 음악을 버릴 수 있나요?”
그때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부모형제를 다 버리고 수도생활을 택하는 마당에 그까짓 음악을 버리지 못 하겠습니까?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정말 당시는 그런 마음이었어요. 하느님 이외에 저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신부님께서는 “그러면 됐다”고 하시며 흐뭇해 하셨고 입회를 허락해주셨지요. 입회 피정에서 이런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오면 음악을 영영 못하는 것으로 알고 완전히 마음을 접었었지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동체의 요구 때문에 야금야금 음악 일을 하게 되고 바로 그 말씀을 하셨던 신부님의 주선으로 신학생 시절에 국악미사 음반을 만들게 됐으니 하느님 뜻은 참 오묘합니다.
음반이 발표되자 여기저기 본당들에게서 국악미사 강습에 대한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유기서원자가 그것도 밤 시간에 수도원을 나가 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장님께서는 선뜻 허락해주셨지요. 하지만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몇 번 나가 가르치자 이제 그만하고 다시 공부에 매진하라는 말씀을 듣게 됐지요. 음악 일은 다시 제 관심에서 멀어졌어요.
신학교 공부를 마치고 서품을 받은 후, 광주 피정집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피정지도를 했지요. 당시에는 피정집이 많지 않아서 거의 매일 피정자들이 있었어요. 사순시기의 어느 날 피정을 마쳤는데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와 “신부님이 국악미사를 작곡하신 강수근 신부님이신가요?”하고 물으시는 거예요. “네, 그런데요”하자 반가워하시며 국악미사를 배우고 싶으시다는 거예요.
그분이 바로 김달 엘리사벳 자매님이셨어요. 광주 쌍촌동본당의 지휘자였는데 몇 년 전 과달루페회 본당 신부님이 국악미사 악보를 건네주시며 “이번 부활 때 이걸로 해보세요” 하시더래요. 그래서 멋도 모르고 신나게 가르치고 부르면서 부활미사 때 봉헌했는데 신자들이 너무 좋아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작곡자 신부님이 계시니까 정식으로 배워서 제대로 부르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때까지 국악미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피정지도로 바쁜 처지여서 자매님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낼 수도 없었고요. 그때 마침 살레시오수녀회 수련소에서 부활 때 쓸 요량으로 저에게 강습을 요청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거기서 배우시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엘리사벳 자매님은 다른 자매님을 한분 더 모시고 오셔서 열심히 배우셨어요.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자매님이 이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좀 더 배우고 싶다고 조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1993년 6월 6일 광주 전남지역 성가대 전례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최초 국악성가 배움터를 명상의 집에서 열게 됐어요.
엘리사벳 자매님의 적극적인 홍보 덕에 20여 개 본당에서 120여 명 성가대원이 참여했지요. 강의실이 꽉 차고 복도까지 사람들이 앉아야 할 지경이 됐어요. 모두가 불평 없이 한마음으로 국악성가를 배웠지요. 참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어요. 하느님께서는 자매님과의 만남을 통해 제 운명을 바꾸기로 계획하신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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