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 갈매못성지 십자가의 길,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불의한 권력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군중의 성난 외침, 그리고 빌라도는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사형을 선고합니다. 불의한 권력이 범한, 역사상 가장 큰 죄악이자 가장 큰 잘못이었습니다. 대체 왜 그를 죽여야 했는지, 빌라도 총독도, 헤로데도, 바리사이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을 물로써 심판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던 노아와 그 식솔들만이 죄악에 물든 세상을 벌하시는 하느님께서 물로 내리신 징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물로도, 불로도 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불과 유황으로 그 벌을 받았습니다.
지난 21일, 여전히 정부는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백남기 농민은 쓰러진지 100일째를 맞았습니다. 불의한 공권력은 멀쩡한 채, 물의 대포를 맞고 쓰러진 농민은 머리를 크게 다쳤고 여태껏 의식을 찾지 못하고 누워 있습니다. 대선 공약으로 쌀값 21만원을 보장하겠다던 박근혜 정부는 17만원하던 쌀값을 오히려 15만원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수입개방 때문입니다. 더 이상 먹고 살길이 없어 농민 생존권 보장을 외치던 농민은 경찰이 조준해 쏜 물대포를 맞았고, 쓰러졌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쓰러짐은 이 땅 농민들에 대한 사형선고입니다. 물대포를 쏜 경찰도, 경찰청장도, 대통령도 사과 한마디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사형선고입니다. 그와 함께 ‘농부이신 하느님’(요한 15,1)도 같이 쓰러졌습니다. 불의한 권력,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듯이, 오늘 이땅, 지금 여기에서 부당한 공권력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애쓰던 이 땅의 농민을 저리 무너뜨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농민입니다… 그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빕니다.
- 맹주형(아우구스티노ㆍ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교육부장)
†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우리 모두 자기 일상의 십자가를 지고 가나이다
함께해서 무겁지만 함께여서 가벼운 가장의 십자가… 남편이란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소서. 아버지란 십자가를 떠안게 하소서. 사회생활의 고통도 은총으로 깨닫게 해주소서.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신비로 이해하게 해주소서.
혼자이면 짊어 질 수 없는 고통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주소서.
주님! 가장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고통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게 이끌어 주소서. 고통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지금은 힘들지만 주님께 의탁해 묵묵히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함께해서 무겁지만 함께여서 가벼운 가장의 십자가를 기꺼이 끌어안게 허락하소서.
- 권준(프란치스코·37·수원교구 정자동주교좌본당)
†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우리 죄의 무게를 얹었습니다
담장 안에서는, 출소만 하면 당신을 기억하고 기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출소 후에는 매일 매일 핑계를 대고 다시금 당신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가 없이 저희를 위하여 피땀 흘려 기도하셨으나 결국은 저희로 인해 매 맞으시고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한 저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 고통에 힘들어 하시는 예수님, 정말로 저희가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당신의 용서로 다시 태어나 더 이상 죄 짓지 않고 당신이 지신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드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이○○(요셉ㆍ57ㆍ2015년 1월 17일 의정부교도소 출소)
†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짐승처럼 몰리는 아들의 모습, 하지만 당신은 주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으십니다
어머니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포근하고 따뜻하면서 강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 어머니는 가장 처참한 모습을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너무나 힘들고 초라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십니다. 도와주고 싶지만 도울 수 없음을. 당신의 아들이 왜,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어깨 위에 그리도 무거운 십자가를 왜 지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을 보면서도 아들이 더 힘들어 할까봐 숨어서 하염없이 눈물을 삼키면서 지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은 더 찢어집니다. 모든 어머니의 마음은 성모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그 이상의 아픔을 느끼는 어머니란 존재. 그 존재는 위대하고 강하며 축복을 받는 이름입니다.
- 장정애(파비올라·57·인천 모래내본당ㆍ가톨릭대학교 부천성모병원 환자)
† 제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더 버틸 수 없을 때, 당신의 힘을 주십시오
로마 병사에 의해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듯이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처음 빈첸시오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돕는다는 큰 사명을 수행하기는 무척이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부담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거창한 일들은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십자가를 돌아가며 들어주면서 이웃의 포근한 사랑을 주고받았고, 이 세상은 나 홀로 걷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의 등에 얹어진 작은 짐을 한 개 덜어주었을 뿐인데 내 등에 올라가 앉아있는 무거운 짐이 두 개 덜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작은 배려와 봉사로 이 세상은 정말 살맛나는 주님의 나라가 됨을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사순시기를 맞아 묵상하며 주님의 사명을 명심하겠습니다. 타인의 십자가가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을 알고 더 기쁜 마음으로 당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가슴을 가지게 해주시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 주님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 김민양(엘리사벳ㆍ서울 번동본당ㆍ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한국이사회 사무국장)
†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
그분 앞에 나서기가 그리 어려웠습니까?
저기 앞에, 무슨 죄를 그리 크게 지었길래 예수님께서는 머리에는 가시관을 쓴 채 피와 땀으로 뒤범벅인지요? 무거운 십자가 때문에 허리는 끊어질 듯, 흔들리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합니다.
애처롭고 안쓰럽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중죄인, 조금 전까지 군중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지요. 그의 곁에는 잠시도 쉬지 않고 로마의 군인들이 채찍질로 다그칩니다. 한 순간, 어느 용기 있는 여인이 주춤대는 군중 사이를 뚫고 나와 예수님의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얼굴을 정성껏 닦아드립니다. 아! 그제야 저는 깨닫습니다. 주춤거리고 주저할 때, 주님은 저만치 멀어진다는 것을. 당신이 가르치신 삶의 지혜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난한 이웃에게 전해야 할 사랑의 계명을, 그 모두를 저는 주춤거리며 다 놓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베로니카가 주님의 얼굴을 닦으며 그분의 수난과 장차 있을 영광을 수건과 자기 가슴에 온전히 새겼듯이, 이제 머뭇거리던 제가 당신 앞에 나설 강단과 결단을 허락하시기를 빕니다.
- 박정호(스테파노ㆍ49ㆍ수원교구 서둔동본당)
†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아무 죄의식도 없이 우리는 물질과 쾌락을 탐합니다
주님! 오늘도 도움을 청하는 이웃들을 지나쳤습니다. 그들은 길가, 지하철역 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매 순간 주님은 그리 제게 다가오셨지요!
차라리 말이나 앞세우지 않으면 좋으련만. 기도라도 정성껏 드려 주면 좋으련만. 잠시 발을 멈추고 눈길 한 번 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거듭 외면한 탓에 당신의 십자가만 무겁게 해드렸고, 급기야 주님을 두 번째 쓰러트렸습니다. 주님! 이젠 제가 당신을 일으켜 드리고, 십자가도 대신 져 드리겠습니다. 설사 쓰러지더라도 십자가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이젠 이웃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니, 주님, 제게 그리 할 힘과 연민의 마음을 허락하소서!
- 박문수(프란치스코ㆍ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 솔뫼성지 야외 십자가의 길,
(사진 윤용선 신부)
(사진 윤용선 신부)
†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울음 삼켜야했던 여인들이여, 언제나 한껏 울어보려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셨고, 여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고 고통 받는 여성들을 치유해 주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도 그 곁을 지킨 여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여성들을 위로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여성들에 대한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기에 감사드립니다.
여성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시는 주님, 지금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과 차별 속에서 고통당하는 여성들을 굽어보시옵소서.
특히 70여 년 전 일제 식민지 민족의 수난 시기에 강제로 전쟁터로 끌려가 성노예로 고통을 당하며 민족의 십자가를 온몸으로 짊어졌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되새기는 우리 모두가 그분들의 고통과 슬픔을 헤아리며 슬퍼하게 하소서. 우리의 눈물이 씨앗이 되어 평화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함께 울게 하소서. 정의로운 해결이 이루어져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이 회복될 때까지 함께 손잡고 행동할 수 있도록 자비의 마음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아멘.
- 김선실(데레사ㆍ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아무리 넘어져도, 당신은 우리를 안아 일으키십니다
“닭이 알을 품듯이 우리를 품어주세요.”
자비로우신 주님, 무거운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시면서도 당신은 여전히 묵묵부답, 다함없는 그 사랑에 말을 잃습니다.
어둡고 편협함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짧은 생각으로 자주 판단하고 훈계해왔던 제가 당신께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자비했음을 고백합니다.
크고 작은 삶의 어려움 앞에 겸손하고 부서진 마음으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이들은 죄의 고백이라기보다, 차라리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삶의 질곡에서 고통을 받아내며 드리는 이 찬미는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뒤늦게 서야 바라봅니다.
사랑스럽고 귀해서가 아니라, 측은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비의 마음을 청하며 당신께 기도합니다. 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들을 옳고 그름을 논쟁하기 이전에 다만 사랑의 마음만으로 받아 안아주게 해주십시오.
저의 죄와 무자비함에도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시는 주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이성구 신부 (대구대교구 안식년)
† 제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발가벗기우신 예수님, 십자가조차 당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구세주 예수님, 병사들에게 옷 벗김 당하는 당신을 보며 아파합니다. 당신의 옷을 벗기고, 당신을 조롱하는 병사들에게 분노합니다. 그러나 주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당신의 모습에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회의 끝없는 욕망으로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아이들을 봅니다.
아이들의 모습을 해치고 조롱하는 병사는 남도 아닌 엄마, 아빠, 부모들이었습니다. 그 사악하고 음흉한 제 얼굴이 거울에 비칩니다. 나는 아니라고, 당신을 조롱하지 않았다고 항변하면서, 당신이 주신 선물을 당신 보시기에 좋을 아이로 키우고 있다고 말해 보지만, 저 또한 사회가 가리키는 성공과 출세를 향해 아이를 질질 끌고 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경쟁의 틀 속에 밀어 넣고, 성공하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친구를 짓밟고 해치라고 말하는 저를 봅니다.
말로만 ‘그리스도인’일 뿐, 삶 속에서 당신을 외면하고, 더 다투라고, 그 싸움에서 이기라고 부추기는 저를 용서하소서. 세상의 잣대로 아이를 저울질하며 다그치는 저를 용서하소서.
- 윤성희 (아가다·39·두 아이의 엄마이자 손편지 강사)
† 제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쾅쾅, 그 망치는 바로 내가 휘두른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손과 발에 굵은 못을 박고야 맙니다.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그들의 존재 자체로 사랑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관계로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멀리서 진정 사랑이 필요한 이들은 돌아보지도 못한 채 ‘사랑’이 아닌, ‘사람’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의 상처가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습니다.
돈과 성공을 좇는 대열에서 물러났다고 스스로 위안하지만 여전히 저는 가난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도구로 세상 속에서 일하겠다는 소명은 잊은 채 자꾸 일의 성취에만 골몰하게 됩니다. 내일의 양식을 걱정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도리라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늘 두 마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저는 결국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저의 불신앙이 예수님의 발에 못을 박습니다.
어찌하면 예수님의 손발에 제가 박은 못을 빼낼 수 있을까요. 제가 감히 그럴 수 있는 존재이기는 할까요.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저를 부르신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가 바라보며 오롯이 환한 빛으로 충만해진다면…. 오직 그 때 저는 예수님 손발의 못을 빼내고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도합니다.
- 김유진(가타리나ㆍ39ㆍ동시인·아동문학평론가)
†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저희를 용서하소서
“다 이루어졌다”시며 당신이 받으신 숨과 영을 아버지께 맡겨드리실 때, 주님, 당신은 세상에서 받으신 피와 물을 다 쏟아 세상 모든 사람과 만물을 씻어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주님, 당신께 창조되어 당신의 만물을 통해 살면서도, 당신도 당신의 창조물도 모르는 것처럼 삽니다. 당신이 마련하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당신의 빛으로 당신의 숨과 당신의 물로 살게 하시고 당신이 흙에서 나게 한 것들로 기르셔도, 저는 이 모든 선물을 모르는 듯 삽니다. 오히려 당신의 집과 땅을 파괴하고 당신의 빛을 미세먼지로 차단하며 당신의 물을 오염시키고 당신의 대기가 이산화탄소로 물들게 해서, 당신의 거처요 우리의 공동의 집인 이 지구가 뜨거워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온 창조물이 신음하게 하며 당신의 고난을 더욱 가중시켜 왔습니다.
부모를 알고 살면 “효자”라 하고, 당신을 알고 살면 “성인”이라 하고, 주님께 불리어 함께 살면 “제자”라 하는데, 당신의 온 창조물을 알고 더불어 살 줄 알면 당신의 “생태인”이라 불리겠습니까, 주님?
당신의 온 창조물은 제각기 당신의 자취요 당신의 초대요 당신의 복음이오니, 주님, 당신의 “생태인”으로서, 당신의 온 창조물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는 당신의 살림을 알고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당신 현존으로 충만하게 하신 당신의 온 창조물과 더불어 당신의 부활의 영광을 경축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 황종렬(레오ㆍ59ㆍ평신도 신학자)
†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시다
제자들은 영원한 이별을 준비합니다
구세주 예수님, 더 없는 고통을 겪으신 끝에 숨을 거두신 당신이 이제 어머니의 품에 안기셨나이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아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에 함께하셨습니다. 저희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처럼 성모님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 예수님 당신께 청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는 자리에도 성모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시어 저희들 곁에 머무르며 저희를 지켜보고 격려하게 하소서.
저승에 가시어 당신을 기다리던 연령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신 주님,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연령들도 기억하소서. 주님께서 연령들을 당신께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시려고 자애로운 팔로 연령들을 안아주려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연령들을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 주시고, 이 세상 살이를 마칠 때 하느님의 참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허락하소서.
- 김승호(스테파노ㆍ59ㆍ인천교구 부천 원미동본당 연령회 회장)
†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무덤에 묻히시어 새 생명이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삶의 벼랑 끝으로 몰아갔습니다.
진리를 위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선 아들이 마주친 인생의 마지막 자리, 빛이 묻힌 무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주변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조차
진리가, 빛이 몸서리치게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덮고, 또 덮고 묻어 버립니다.
조용하게 입 다물고 있으라 몰아넣고는 무섭게 닫아버린 무덤들이 많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과 진리들이 온통 묻혀 있습니다.
이제는 세상은 조용해 질 것이고 다 끝이 났다고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그러나 무덤이 끝자리가 될 수도, 진리를 무덤에 묻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를 무덤에 밀어 넣었지만 부활의 빛은 무덤 속까지 뒤집어 밝힙니다.
평화를 이루고 불의에 맞섰던 장한 무덤들 안에서
부활의 당찬 빛은 세상을 열어젖힐 것입니다.
- 김효임 수녀(골롬바ㆍ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