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 ‘병인년 땅의 기억’은 먼저 병인박해 전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을 보여준다.
1846년 병오박해 이후는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 조정은 서양세력의 침략과 정국의 동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크게 완화한 상황이었다.
당시 발표된 ‘장주교윤시제우서’(1857)는 당시 신자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발표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지도서인 ‘장주교윤시제우서’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모든 신자가 수신인인 이 교서는 혼인에 있어서 자녀의 의사를 존중할 것과 과부의 재혼을 권고하는 등 당시의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 또 베르뇌 주교는 고아나 기아(棄兒)를 거두어 양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성영회’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도 촉구했다.
철종 사망(1863년) 후 베르뇌 주교가 신자들에게 쓴 ‘성인 베르뇌 주교의 1864년 교서’에는 새로 즉위한 고종의 건강과 나라의 태평,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한마음으로 열심히 수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병인박해 전, 교세는 점점 성장하고 있었지만, 조선은 서양 열강의 개항 요구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당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 주교의 힘을 빌어 막으려 했다. 덕분에 당시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와 비밀리에 접촉했던 대원군은 상황이 조선에 유리해지자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사학한가사변물방매성책’(1866년)은 병인박해 초기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의 가옥과 가사도구 등 재산 일체를 몰수한 기록이다. 이 책에는 교인이 살던 장소와 이름, 재산 목록, 금액 등이 드러나 있다. 주방용 도구들 중에 유독 항아리 종류가 많이 보이는 것은 당시 천주교 신자 상당수가 옹기 제작과 판매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명단과 약전을 수록해 시복 수속을 위한 예비조사 자료로 사용된 ‘치명일기’(1895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본 직간접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한 기록인 ‘병인년 치명사적’을 통해서는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지독하게 이어진 박해를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 탁희성 화백의 ‘순교사화’는 절두산 순교자들의 수난을 압축적으로 그려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지난해 연말 완성된 절두산 순교자 ‘하느님의 종 13위’의 초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들어있는 13위의 순교자화는 순교자 약전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고, 의복과 성물 묘사를 위해 김성태 신부(전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의 고증도 거친 작품이다.
절두산 순교성지의 원래 이름은 누에고치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었다. 그러나 병인양요로 박해가 확산되면서 이곳은 머리가 잘린 산이라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이 됐다. 병인년 순교 150주년과 자비의 희년을 지내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목숨 바쳐 세상에 알린 순교자들의 고귀한 신앙 유산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자.
▲ 장주교윤시제우서, 1857년.
▲ 성인 베르뇌 주교의 1864년 교서.
▲ 사학한가사변물방매성책, 1866년.
▲ 치명일기, 1895년.
▲ 탁희성 화백의 순교사화.
▲ 김기희 작가 작품 김큰아기 마리아.
▲ 박강원 작가 작품 강요한.
▲ 주태석 작가 작품 이기주 바오로.
▲ 김형주 작가 작품 김이쁜 마리아.
▲ 조영동 작가 작품 김진구 안드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