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대리구 고등동본당(주임 김길민 신부)은 교구 첫 주교좌성당으로 교구 역사의 산 증인과 같이 자리매김한 본당이다.
신앙공동체가 없던 수원 도심에 수원본당(현 북수동본당)이 설립되자 신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수원본당은 1945년부터 수원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고등동을 수원과 화성 북부를 전교하기 위한 거점으로 눈여겨봤다.
하지만 고등동본당 설립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25전쟁이 발발해 1959년에야 설립이 이뤄졌다.
본당은 설립과 동시에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고 교리경시대회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이런 열성적인 사목활동에 힘입어 1960년대에는 연평균 10% 이상의 신자 증가율을 기록했고, 서둔동·세류동본당 등을 분가시켰다.
또 지역사회를 위한 공헌활동에도 힘써 1960년 성당을 마련하고 이어 1962년 소화유치원을 개원해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1963년 교구가 설정되자 본당의 성당은 주교좌성당으로 새 면모를 갖췄다. 본당은 주교좌로서 초대 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와 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착좌식뿐 아니라 사제서품식과 교구의 주요행사를 13년 7개월 동안 도맡아왔다.
본당이 주교좌로 지정된 이유는 수원 시내의 성당 2곳 중 비교적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 북수동성당은 교구 행사를 치르기에는 협소했다. 하지만 본당의 성당 역시 전후 가난 속에 원래 계획보다 1/3 가량의 규모로 지어져 500여 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었다.
이에 교구는 새 주교좌성당을 마련하기로 계획하고 1976년 조원동주교좌성당을 봉헌했다. 본당의 성당은 준주교좌성당이 됐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까지 본당은 신자증가율이 최고 15%에 이르는 등 선교의 전성기를 맞았다. 본당은 화서동본당을 분리하고 본당 관할 구역을 매교동본당에 이관하면서도 신자 수가 증가해 1980년대 초 2700여 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10년도 채 안 돼 4000명을 넘어섰다. 본당 신자의 증가와 성당 노후화에 따라 1993년에는 지금의 성당을 완공했다.
1999년부터 고등동지역 인구가 타 지역으로 급격하게 이주함에 따라 한때 5000명이 넘던 본당 신자 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본당 관할 지역이 재개발 중으로 신자 수가 2000명이 채 되지 않지만, 재개발이 완료되면 다시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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