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신부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존재 깊이 체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기는 라르쉬 공동체에서의 체험이었습니다. 나웬 신부 저서 「탕자의 귀향」 마지막 장을 읽어보면, 루카 복음 15장의 ‘잃었던 아들’에 대한 렘브란트 그림 앞에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소명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지체장애우들과 함께하는 라르쉬에서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정신지체를 가진 이들의 공동체를 방문했다가 렘브란트의 그림과 대면하면서 구원의 신비에 깊이 뿌리내린 관계를 맺게 됐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은총과 가난한 이들이 베풀어준 축복 사이를 연결 지을 수 있게 된겁니다… 라르쉬가 준 가장 큰 선물을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아버지가 되라는 도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과 그 도우미들의 공동체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건 작은아들과 큰 아들이 씨름했던 문제들과 투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오는 아버지는 온갖 고통을 통해 텅 빈 상태에 이른 아버지입니다. 아픔과 괴로움을 안겨주었던 수많은 ‘죽음들’을 겪으면서 아버지는 주고받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앞으로 내민 노인의 두 손은 구걸하거나, 무언가를 붙들거나, 요구하거나, 경고하거나, 심판하거나,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은총을 베푸는, 가진 것을 다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손입니다… 4년 전,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을 보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만 해도 본 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경외감을 품은 채, 거장이 이끄는 자리에 서 있었을 따름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라르쉬에서의 삶도, 렘브란트의 그림과의 만남도 우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웬 신부가 사제로서의 소명을 시작하고, 사목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영적인 저서를 쓰기 시작한 젊은 시절에 이미 그의 마음에 뿌려지고 자라나기 시작한 영성이 이러한 결정적 시간을 필연적으로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일찍이 뿌려진 영성의 씨앗이 고뇌와 회의, 스스로의 약점과 불완전함, 세상의 고통과 함께 성숙되고 정화되고 화해를 이루며 이제 나웬 신부가 「마지막 일기」에서 ‘약함의 영성’(spirituality of weakness)이라 부른 열매로 드러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웬 신부는 자신의 영성의 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이미 젊은 시절에, 자신을 유명하게 한 명저 「상처받은 치유자」(이봉우 옮김, 분도출판사, 2001)에서 이미 예견한 듯싶습니다. 그는 여기서 우리의 영적 삶에게 가장 큰 위험은 자신들에게 ‘두려움이나 고독, 혼란이나 회의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전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온전함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깨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된 봉사와 섬김의 사목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로서의 삶이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그의 영성의 기본방향은, 그가 이제 사회 생활을 힘차게 시작하는 스무 살 난 조카를 위해 쓴 편지 형식의 영적 권고인 「내 인생의 의미–마르코에게 보내는 편지」(이경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8)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영성과도 근원적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나웬 신부는 이처럼 섬세하고 예리한 자신의 직관을 통해 발견한 영성의 길이 관념이 아닌 실재임을 확인하는 여정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걸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실제로 걷고, 살아내고, 결단하고, 그러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두움, 확신과 불안한 회의 등을 남김없이 겪으며 자신 안에 ‘약함의 영성’을 체화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길을 걷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라르쉬에서 만나고 우정을 나눈 아담 에르네트(Adam Ernett)였습니다. 그는 심각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나웬 신부는 아담이 순수한 ‘약함의 영성’으로 그를 이끌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 아담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축복이었으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탁월하게 증언했는지를 알리고 싶어 했고, 그의 바람과 노력은 「아담」(김명희 옮김, IVP, 1998)이라는 작은 책으로 열매 맺었습니다.
아담, 그리고 이별
나웬 신부는 안식년 중 2월 12일에 라르쉬 공동체의 봉사자들을 통해 아담이 곧 선종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급히 달려와 병상의 아담을 바라보고 그의 부모들과 슬픔을 나눕니다. 그날 밤, 숙소에서 나웬 신부는 아담이 주님 품에 안겼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아담이 주님께로 간 날부터, 아담의 장례미사 때까지, 그리고 그 한 주 후인 2월 21일 ‘재의 수요일’까지 나웬 신부 일기들은 아담의 삶과 죽음이 가진 의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즈음 그의 묵상은 「마지막 일기」 중에서도 아마도 가장 아름답고 마음을 움직이는 대목일 것입니다. 나웬 신부는 이미 자신이 생사의 기로를 넘겼을 때,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죽음에 대해 깊은 묵상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아담의 죽음을 보면서도 그는 다시금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진정한 만남을 위한, 마지막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신앙 안에서 발견하고 확신합니다. 그는 아담이 주님께로 간 날 이렇게 일기에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죽었고 그의 삶은 끝났다. 그의 얼굴은 평온하다. 나는 크나큰 슬픔과 감사의 정을 느꼈다. 나는 동반자 한 사람을 잃었지만 남은 생에 후견인 하나를 얻었다. 아무쪼록 모든 천사가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고 고향에 따뜻이 맞아들여 그가 사랑하는 하느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아담을 눈여겨보며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달았다. 여기 한 젊은이가 평화로이 누워 있다. 이제 길고 긴 고통은 끝났다. 그의 아름다운 영혼은 더 이상 스스로를 표출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 육신 속에 갇혀 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이 서른네 해의 포로 생활이 갖는 심원한 의미에 대해 자문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믿고 기다려야 한다.”
몇 개월 후, 많은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시점에, 아마도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때에 나웬 신부는 지상의 벗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벗들에게,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아담의 죽음이 그러하듯 그의 죽음 역시 가장 깊은 의미에서 하느님과의 화해를 증언하는 선물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삶과 글을 통해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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