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에 찾은 성당은 문이 열려있었다. 미사 전이면 언제나 열리는 성당 문이지만, 이 문은 이제 24시간 동안은 활짝 열려있을 문이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성당을 찾아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는 ‘주님을 위한 24시간’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한 24시간’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요청에 따라 전 세계교회가 함께 거행하는 기도 시간이다. 이미 2014년부터 해마다 사순 제4주일을 앞둔 금·토요일 진행됐지만, 교회는 특별히 자비의 희년을 맞아 더 많은 이들이 이 기도에 참여하도록 권고했다.
성시간. ‘주님을 위한 24시간’의 시작이었다. 성체현시와 성체조배, 기도, 성체강복으로 이뤄진 성시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고통 중에 기도한 것을 떠올리면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수의 성심을 기억했다.
성광에 성체가 현시됐다. 다른 신자들처럼 무릎을 꿇은 채 성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를 바라봤다. 성체조배 중 해설자가 묵상 글을 낭독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며 발표한 칙서 「자비의 얼굴」이었다.
묵상 글 낭독이 채 끝나기 전에 고해소로 향했다. 이 24시간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바치려면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고해소에 들어가 성호를 긋자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사실 이번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고해성사를 했는데, 그 짧은 기간에 또 똑같은 잘못들을 지었음을 고백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해사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듣고 “이 시간에 은총을 많이 받으라”고 말하면서 사죄경을 외웠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해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고 또한 늘 새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끊임없이 용서해 주신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이 느껴졌다.
성시간을 마치면서 주님을 위해 이 24시간을 온전히 봉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먼저 휴대전화의 배경화면을 성체가 현시된 성광으로 바꿨다. 하루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휴대전화를 볼 때마다 주님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또 밀떡의 형상 안에 살아계신 주님이 계심을 기억하면서 가족을 대할 때도, 일을 할 때도, 내 앞에 있는 모든 모습 안에 주님이 계심을 잊지 않고 24시간을 성체조배하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다.
다음날 5일, 성체조배를 위해 성당을 찾았다. 성체 앞에서는 신자들이 소공동체 별로 돌아가며 성체조배를 하고 있었다. 조배는 침묵 중에 이뤄졌다. 고요한 가운데 그저 성체를 바라봤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족과의 관계,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 온갖 고민과 걱정이 떠올랐지만, 이 모든 것을 자비롭게 받아주시리라 믿으면서 이마저도 기도로 올렸다. 동시에 아직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점심은 거르기로 했다. 하느님처럼 자비로울 수는 없겠지만, 이 24시간 동안 작게나마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가장 배고플 시간의 식사비용을 아껴 제3세계 아동의 식비로 봉헌했다. 나에겐 한 끼 식사 값일 뿐이지만, 굶고 있는 아동 한 명이 한 달 동안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비용이었다.
주님을 위해 성체조배를 하는 마음으로 보낸 24시간의 마지막은 미사로 마무리했다. 24시간 내내 자주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했던 하루. 그 하루 끝에 성체를 모시는 것은 평소 습관처럼 혹은 기계적으로 성체를 모실 때완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365일 중 겨우 하루를 봉헌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분 앞에서 나는 온전히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또다시 죄를 짓고 하느님을 종종 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서 얻은 감동은 다시 주님께 돌아갈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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