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순교 성인 10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 베르뇌 주교, 볼리외 신부,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다블뤼 주교, 유스토 신부, 도리 신부.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교회의 관계는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대목구장으로 임명하면서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에서 진행한 선교역사가 한국 천주교회사의 굵직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전교회와 한국교회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됐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초대대목구장부터 1942년 노기남 대주교가 제10대 교구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약 110년간 9대에 걸친 교구장직을 승계했다. 병인박해 때까지 재임한 5명의 대목구장 중에서는 병사한 브뤼기에르 주교와 페레올 주교를 제외하고 3명이 시성되기도 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던 초대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역설적이게도 조선 땅에 입국하지 못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맨 처음 한국에 입국한 신부는 성 모방 신부였다. 그는 1836년 조선에 입국했고, 이듬해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에 성공했다. 이로써 조선대목구는 교구 설정 6년 만에 주교와 사제, 신자로 구성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이들 세 선교사는 모두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들 세 선교사는 입국한 뒤 가장 먼저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 정신에 근거해 ‘본토인 성직자 양성’에 나선 것이다. 이를 통해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배출됐다.
▲ 뤼 드 박 128번지 위치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파리외방전교회는 1853년에는 충청도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해 성직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이 같은 방침은 선교 지역에 자립 교회를 빨리 만들어 정식 교계제도를 설정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신학생 양성뿐만 아니라 출판 및 당시 기록 수집에도 큰 역할을 했다. 앵베르 주교와 페레올 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순교자들의 치명사적을 조사해, 이후 1925년 79위 순교자가 시복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선교사들은 파리 본부에 각종 보고서와 서한을 보내 한국교회의 소식을 전했다. 이러한 기록은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로 이어졌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건축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코스트 신부는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해 고딕양식의 벽돌 건물을 한국에 소개했다. 이밖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교육, 시약소 운영 등의 의료 활동도 진행했다. 이 같이 활동들은 100여 년간 한국교회를 포함해 한국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기나긴 박해는 수많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 순교했고, 1866년 병인박해에는 무려 9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 중 10명의 선교사는 1984년 시성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현재 사목 활동을 대부분 현지인 성직자에게 인계하고 주요 특수사목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그간 4300여 명의 선교사를 아시아 각국으로 파견했고, 그 중 170여 명이 순교했다.
■ 서울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
“103위 성인 중 10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현양사업 함께 이어가야”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생적으로 탄생한 한국교회를 보편교회 안에서 성장하도록 돌봐준 소중한 은인들입니다. 한국교회는 100여 년간 우리 교회를 이끌어 온 이들 선교사들의 신앙과 죽음을 무릅 쓴 선교정신을 이어나가 복음화를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병인순교 150주년과 한불수호조약 130주년을 기념해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3월 2일부터 11일까지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이라는 주제로 프랑스 특별 순례를 다녀왔다.
순례단을 이끈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는 “죽음을 각오하고 조선 행을 택한 이들의 신앙여정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면서 “한국교회 성장에 도움을 준 이들 선교사의 숭고한 순교정신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들에 대한 현양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몇몇 사람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병인양요를 일으키는 등 선교를 표방한 프랑스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에 앞장섰다고 비난하지만, 이들이 목숨을 바쳐 증거한 신앙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면서, “이들의 작은 과오보다는 신앙을 위해 조선에 온 이들 선교사의 뜻을 봐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원 신부는 “이들 선교사들은 프랑스를 출발하는 순간 조선 땅에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굳은 결의를 맺은 사람들이라면서, 한번 떠나면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선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나 프랑스교회나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1984년 시성된 한국의 103위 성인 중 10명이 프랑스 선교사들이지만 한국 신자 중에 이들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이들 선교사에 대한 현양사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원 신부는 그나마 한국 신자들이 이들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찾으면서 프랑스교회가 이들에 대한 현양사업의 필요성을 각성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그는 “과거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 신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줬다면, 지금은 거꾸로 한국 신자들이 프랑스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찾아 프랑스를 방문하고 그로 말미암아 프랑스교회가 이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양국 교회는 물적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위해 이들에 대한 현양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 신부는 오는 10월에 예정된 프랑스 주교회의 한국 순례단 방문이 양국의 교류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프랑스 주교회의가 어느 한 나라에 대규모 공식 순례단을 파견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이는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의 영성과 삶이 이들이 보고 배워야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임을 방증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