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금교정책과 탄압이 본격화되던 1624년 11월 15일 일본 나가사키(長崎). 한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십자가에 묶였고 하느님과 성모님을 외쳤다. 불길은 타올랐고 그들은 신앙을 지키며 장렬하게 순교했다. 53세 일본인 고이치 디에고와 40세 조선인 카이요(Caius, 일본어 カイヨ). 이들은 지금도 한국과 일본 교회일치를 상징하는 등불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로부터 390여 년이 지났다. 대구대교구와 일본 나가사키대교구가 힘을 합쳐 이들의 고귀한 순교를 기념하는 현양비를 일본 현지에 세웠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대구대교구 평신도위원회(회장 이호성, 담당 박영일 신부) 성지순례단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다. 성지순례단은 일본 가톨릭 순교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나가사키와 고토(五島) 지역을 순례하며 양국 교회 교류와 일치를 생각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한일 양국 교회가 함께 어우러지는 장이 된 순례 현장을 밀착 취재했다.
‘고이치 디에고와 조선인 복자 카이요 순교 현양비’ 축복
3월 17일 오후 4시 일본 나가사키 니시자카(西坂) 공원에 있는 ‘26 성인 기념관’ 2층 야외정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일본 나가사키대교구장 다카미 미츠아키(高見三明) 대주교가 ‘고이치 디에고와 조선인 복자 카이요 순교 현양비’ 축복식 주례를 위해 나란히 섰다.
축복식에는 순교 현양비를 조각한 최종태(요셉·84) 서울대 명예교수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함께 자리했다. 대구대교구 김성래·이찬우 신부와 대구대교구 평신도위원회 성지순례단 20여 명을 포함해 나가사키대교구 측 사제와 수녀들도 축복식에 참석했다.
축복식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 일간지와 방송사 등 취재진들도 대거 몰려들었다. 이번 축복식이 양국 교회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그 역사적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조 대주교와 다카미 대주교는 경위 설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분 순교자들은 나라와 환경은 달랐지만 같은 신앙을 공유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유대감으로 일치했다”고 밝혔다. 또 “우리도 국가와 문화, 역사는 다르지만 신앙과 사랑의 힘으로 하느님 사랑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하자”고 입을 모았다.
조 대주교는 강론에서 한일 교회일치와 협력을 상징하게 될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며 벅찬 감정을 표시했다. 오래 전부터 협력 관계를 맺어온 대구대교구와 일본 나가사키대교구는 수년간에 걸쳐 이번 순교 현양비 건립을 준비해왔다. 조 대주교는 “축복식이 열리는 오늘은 일본 신자발견 151주년 기념미사가 봉헌되는 날이기도 해 더욱 뜻깊다”며 “민족이나 언어를 초월해 하나된 신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자”고 강조했다.
이어 열린 제막 행사로 그 모습을 드러낸 순교 현양비는 교회 성상(聖像)조각 대가로 불리는 최 명예교수가 혼신을 다해 만든 역작이다.
현양비 조각 그림은 순수한 모습을 띤 두 순교자가 함께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서울 절두산 성지에 1973년 세워진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등에서 최 명예교수가 보여준 작품 세계와 맥락을 함께한다.
총 제작기간은 2년, 그는 작품 완성을 위해 고령의 몸을 이끌고 한국과 일본을 5번이나 왕래했다. 최 명예교수는 “순교 현양비를 둘러보는 한일 양국 신자들이 서로 더욱 친근감을 갖게 되고 상호 교류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순교 현양비에 함께 손을 잡은 모습으로 새겨진 조선인 복자 카이요와 고이치 디에고의 사연은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이요는 유년 시절 조선에서 승려로 은둔생활을 하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으로 끌려왔다. 주인의 배려로 해방돼 절에서 생활하던 그는 예수회 선교사 모레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회 입회를 갈망하며 전교에 열중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이 1614년 1월 선포한 금교령으로 붙잡혀 투옥돼 모진 박해를 감내해야 했다.
카이요는 감옥에서 매를 맞고 고문당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위한 행복으로 참고 견디며 기뻐했다. 이 때 그가 만난 이가 바로 일본인 고이치 디에고다. 고이치는 일본에서 도미니코회 선교사를 자신의 집에 숨겨줬다가 체포돼 카이요와 같은 감옥에 투옥됐다. 이들은 신앙으로 함께 깊은 일치를 나눴고 함께 화형당했다. 카이요는 1876년 7월 7일 일본 205위 복자와 함께 시복됐다.
이토록 질기고 모진 박해 속에서도 부활한 오늘날 나가사키교회 모습은 ‘순교의 땅’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없다. 일본 신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 이후 250년 동안 기나긴 잠복을 해야 했다. ‘숨은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가쿠레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은 바로 이 고난을 상징하는 말이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지만, 일본교회 역사는 한국교회 역사와 매우 흡사하다.
순례단은 축복식에 앞서 나가사키 니시자카(西坂) 공원을 둘러봤다. 일본 최초로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159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당시 통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잔인한 탄압을 일삼았다. 1597년 2월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 등 26명이 십자가형을 당했다. 이들은 1862년 성인 반열에 올랐고 시성 100주년인 1962년 니시자카 공원에 ‘26 성인 기념상’이 완성됐다. 성인들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담긴 기념상 뒤편에 ‘26 성인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순례단은 이어 이날 오후 7시 나가사키 오우라천주당(大浦天主堂)에서 다카미 대주교 주례, 조환길 대주교 등 공동집전으로 봉헌된 ‘일본 신자발견 151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했다. 지난 1865년 3월 17일 프랑스 선교사 프티장 신부를 찾아온 일본인(가쿠레 기리시탄)들이 서로의 신앙이 같음을 확인했다. 수백년 극심한 박해로 신앙 명맥이 끊긴 줄 알았던 일본에 신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신자발견’ 사건이다.
다카미 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오늘 한국 대구대교구장님과 성지순례단이 뜻깊은 축복식을 마치고 미사에 참석했다”고 소개했다. 일본 신자들이 감탄사를 연발했고 환영하는 박수가 쏟아졌다. 이날 나가사키 순례 안내를 맡은 이 율리에타 수녀(예수성심시녀회)는 “현양비 축복식을 통해 한일 교회 교류가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순례단도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공통분모를 가진 일본교회와 한국교회는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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