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시와 충북 감곡이 맞닿은 곳 장호원에 들어서면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성당이 보인다. 묵묵히 신앙을 이어온 공동체, 용인대리구 장호원본당(주임 한태문 신부)의 신앙터다.
장호원 지역에는 박해시대부터 이어오는 여러 교우촌이 있었고, 교구의 두 번째 본당인 미리내본당이 설립될 당시부터 본당이 있었다. 바로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이었던 부엉골 신학교에서 시작된 본당이 이 지역으로 이전해왔던 것이다.
부엉골에 주재하고 있던 파리외방선교회 부이용 신부는 1896년 10월 이 지역으로 본당을 옮기고 ‘장호원본당’이라 불렀다. 부엉골에서 옮겨온 본당은 행정상 장호원이 아닌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였다. 왕장리는 장호원과 작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마을로 행정상으로는 충북이었지만 ‘충청도 장호원’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도 장호원성당과 청주교구 감곡본당 사이 직선 거리는 2㎞에 불과하다.
1958년 청주대목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장호원본당은 감곡본당과 서울교구에 속한 장호원 공소로 나눠졌다. 장호원 지역은 감곡본당에서 떨어져 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이에 장호원 공소는 2년 뒤인 1960년 3월 19일 본당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본당 승격 당시 관할 공소는 19개에 총 신자 수는 1200여 명이었다.
본당으로 설립되고 주임신부가 파견됐지만, 본당은 성당도 사제관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초대 주임인 정주성 신부는 반월성에 우선 자리를 잡고 본당으로 왕래하면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본당 설립 전 공소 교우들이 돈을 모아 임야를 매입했지만, 성당을 건축할 만큼 기금이 넉넉지 않아 건축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본당은 장호원 진암리 소재 공민학교(현 부원고등학교) 건물을 일부 빌려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 사제관도 본당이 설립되고 2년이 지나서야 신축했다.
본당은 1964년이 되어서야 성당 건축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혀 공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성당 신축에 뛰어들어 벽돌 한 장 한 장 직접 찍어 성당을 완성시켜나갔다. 그렇게 1970년 5월 시멘트 벽돌, 슬레이트 지붕 구조로 된 2층 성당의 낙성식이 거행될 수 있었다.
관할 지역이 넓고 연로한 신자들이 많은 본당은 성당과 거리가 먼 지역에 공소강당을 두고 구역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비록 공소예절은 없지만, 나래리와 방추리, 금호리에 위치한 공소강당은 소공동체모임, 레지오마리애 주회합 등으로 활용한다. 기존에 공소가 있던 곳이기에 소공동체 신자들의 두터운 친교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노인사목활성화와 선교활동에도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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