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 왜 한동안 안 오셨어요! 밥 없이 김치 많이 드리면 되죠?”
봉사자가 살가운 미소로 손님을 맞는다. 손님은 멋쩍은 듯 웃더니 봉사자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다. 한동안 오지 않던 손님이지만, 봉사자는 그의 취향까지도 기억해내고 식사를 준비해나갔다.
미리 데워놓은 물을 작은 냄비에 팔팔 끓여 스프와 면을 넣는다. 2분30초 정도 지나면 파와 계란을 넣는다. 오늘 라면에는 특별히 후원받은 게맛살도 넣었다. 3분40초에 맞춰둔 알람이 울리면 라면을 그릇에 담는다. 여기에 김치와 밥을 함께 낸다. ‘햇살이 가득한 집’이 자랑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다.
“아유, 이 집 라면이 제일 맛있어. 집에서는 왜 이 맛이 안 나오나 몰라!”
라면 맛을 본 어르신이 엄지를 치켜 세우면서 웃음 만발이다. 봉사자도 “맛있게 드세요”라면서 함박웃음을 보인다.
무료급식소 ‘햇살이 가득한 집’의 유일무이한 메뉴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인스턴트 라면’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무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라면으로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다.
라면을 먹는 이들 중에는 허름한 옷차림에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멀끔하게 차려입은 신사도 있다. 어떤 이는 그냥 “출근하는 길에 이곳이 있어 잠시 들러 먹고 간다”고 굳이 묻지도 않은 이유를 말하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겨우 라면 한 그릇’이기에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겨우 라면 한 그릇’조차 대접받지 못하는 이들도 이곳에 올 수 있다.
▲ 2014년 ‘햇살이 가득한 집’을 개원한 최성일씨가 갓 끓인 라면을 제공하고 있다.
매일 이곳에서 식사한다는 정안나(가명)씨는 “요즘 세상에 누가 라면 한 그릇이라도 주겠냐”면서 “정성이 담긴 따듯한 라면에 마음이 따듯해진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라면을 내던 김 데레사(가명·54)씨가 “오늘은 아마 인근 복지관이나 교회에서 식사를 주는 날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흔히 보던 무료급식소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겨우 10㎡ 남짓한 공간에 주방과 좌석이 8개뿐인 단출한 분위기도 그렇지만, 식사 개시 전부터 줄을 서있는 사람도 없고, 왁자지껄했다가 한 번에 우르르 빠져나가는 모습도 없다. 그저 문이 열려있는 오전 11시~오후 2시 사이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편한 시간에 찾아와 라면을 먹었다.
‘햇살이 가득한 집’을 찾는 이는 하루 평균 30여 명. 하지만 요일별로 기복이 심하다. 수요일은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사람이 많고, 주일엔 사람이 적다. 인근 사회복지시설에서 식사를 제공하면 그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곳이 연중무휴 열리는 것은 사회복지시설에서조차 밥을 얻어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유한 집은 있지만 생활비가 없는 사람, 돈을 버는 자녀가 있지만 생활비를 받지 못하는 어르신, 사회적 체면 등을 이유로 시설이용을 거부하는 사람 등 이유는 다양하다.
최성일(요셉·62·안산대리구 광북본당)씨가 ‘햇살이 가득한 집’을 마련한 것도 이런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서다.
평소부터 이웃과 나눔을 실천하고자 생각하고 있던 최씨는 2014년 서울 송파구에서 일어난 ‘세모녀 자살사건’과 10만 원이 든 봉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독거노인의 사연을 듣고 무료급식소 마련을 결심했다.
급식소를 마련할 물질적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그는 10년 전 수천만 원에 달하는 미수금을 시작으로, 부도를 겪고 신용불량자가 돼 지금도 월세방에서 살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라면 한 그릇 나누는 정도라면 이런 형편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눔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라면 한 그릇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비용이 있어야 했다. 급식소 월세에 전기·수도·가스 요금에 라면·쌀 등의 식재료까지 한 달 운영비가 100만 원 가량은 필요했다.
최 씨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었다. 하지만 운영비가 모자라 전전긍긍할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오곤 했다.
이렇게 어려운 중에도 나눔을 실천하는 이유를 묻자 최씨는 “환갑이 넘었는데 더 늦어 봉사할 수 없게 되면 후회할 것 같았다”면서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어떻게든 꾸려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햇살이 가득한 집’ 한쪽 벽에는 후원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용자들이 식사를 전해주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그들을 위해 짧은 기도라도 바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급식소를 운영하는 최씨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만큼, 운영비는 대부분 후원자들의 정성으로 마련하고 있다.
돈으로 후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라면 박스나 쌀 등을 후원하는 이들도 있다. 후원하는 금액도 크지 않다. 최씨는 2만 원이면 30명이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라면 한 박스를 살 수 있다고 했다.
봉사자들의 도움도 크다. 최씨의 뜻에 공감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자비를 실천하려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매일 돌아가며 급식소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봉사자들은 “이렇게 굶주리는 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할 지 몰랐다”면서 “이곳에서 봉사할 수 있어 기쁘다”는 반응이다.
최씨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웃을 돕겠다는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만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위치한 라면 무료 급식소.
‘굶지 마시고 오세요’
‘햇살이 가득한 집’ 입구에 붙은 문구가 어쩐지 간절하게 느껴졌다.
최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근처 공원 등에서 차가운 우유와 빵을 먹고 있는 어르신이 계시지는 않은지 둘러보곤 한다. 그래도 운영한 지 1년 반 가까이 되는 요즘은 입소문을 탔는지 새로운 이용자들이 꾸준히 오고 있다.
최씨는 “여기(급식소)에는 문턱이 없는데 아직도 문턱이 높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면서 “진짜 배고픈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기쁘다”고 말했다.
어느덧 2시. ‘햇살이 가득한 집’을 정리할 시간이다. 봉사를 마친 김 데레사씨는 “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말했다. 부활한 예수님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이다.
급식소를 나와 맞은편의 광북성당을 바라보니 두 팔을 감싸주듯 뻗고 있는 예수성심상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햇살이 가득한 집’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저 라면 한 그릇이지만 배부르게 먹고 떠나는 얼굴들. ‘햇살이 가득한 집’에는 그 얼굴의 숫자만큼이나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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