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는 극심한 고문과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선조들의 뜻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모진 박해의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대구대교구 평신도위원회(회장 이호성, 담당 박영일 신부) 성지순례단이 3월 18~19일 이 땅을 찾았다. 한국교회 역사와 닮은꼴인 고토 신앙 역사를 통해 순례단은 순교자 뜻을 기리고 한일 교회 일치와 화합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고토 박해’ 그 처절한 신앙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금교령을 내리고 혹독한 탄압을 거듭했다. 250여 년 세월, 일본 신자들은 ‘숨은 그리스도인’(가쿠레 기리시탄, 隠れキリシタン)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1865년 나가사키 오우라천주당(大浦天主堂)에서 ‘신자 발견’이 있은 후 일본 내 숨은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돌아왔다. 이제 떳떳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희망도 잠시, 1868년 메이지 유신 정부는 또다시 금교 정책을 내놓는다.
‘고토 박해’ 역사는 그 때부터 시작됐다. 1868년 고토 히사카시마(久賀島)에서 신자들이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는다. 순례단이 찾은 로우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牢屋の窄殉敎記念聖堂)은 바로 그 순교 장소에 1969년 세워졌다.
당시 신자들은 ‘다다미’ 12장 정도 되는 면적(약 20㎡) 밖에 되지 않는 좁은 감옥에 200여 명이나 감금됐다. 다다미 1장에 17명 꼴이다. 누울 수도 없었고 배변도 그 자리에서 해야 했다. 하루에 고구마 한 조각이 이들에게 주어진 음식 전부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몫을 내놨다.
8개월에 걸쳐 굶주림과 고문에 시달리던 이들 중 고령자와 젖먹이 아이 등 39명이 숨졌다. 감옥에서 나간 후에도 3명이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순례단은 ‘다카노스 신앙의 유산(鷹ノ巣の信仰の遺産)’ 순교비를 찾아 참담한 당시 상황에 안타까워했다. 1870년 어느 날 밤 다이노우라(鯛の浦) 다카노스(鷹ノ巣) 지역에 사는 신자 집에 갑자기 칼을 든 무사 4명이 들이닥쳤다. 금지된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이들은 임신한 여인을 포함해 6명을 살해했다. 다음날 참사 현장을 발견한 주민들이 관청에 신고했다. 관청은 살아남은 6세 아이 증언으로 범인을 잡았다. 당시 아이는 하느님 계시를 받기라도 한 듯 범인 한 명 한 명을 지목했다고 전해진다.
고난을 넘어 새 역사를 만들다
박해는 고토 열도 전체로 확산됐지만 신자들은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왔다. 와카마쓰(若松)항에서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기리시탄 동굴(キリシタンワンド)’은 당시 신자들의 눈물겨운 신앙 지킴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박해를 피해 신자 3가구가 몰래 배로만 들어갈 수 있는 동굴에 들어와 생활한 것이다. 폭 5m 정도의 좁은 동굴 벽에 성모상을 모시고 십자가를 새겼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열매를 맺었다. 드디어 1873년 금교령이 해제된 것이다. 신자들은 그동안 받았던 박해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진해 재산을 바치고 노동력을 제공하며 성당 건축에 나섰다.
무인도였던 가시라가시마(頭ヶ島)에 있는 가시라가시마 천주당(頭ヶ島天主堂)도 그 노력 중 하나다. 박해를 피해 숨어 있다 마을로 돌아온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성당 건축을 시작해 1887년 목조 성당이 완성됐다. 순례단이 찾은 가시라가시마 천주당은 1917년 일본에서 보기 드문 석조 성당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성당 외부 주재료인 사암은 신자들이 배로 운반해 손수 하나씩 잘라 쌓아 올려 만들었다. 자금난으로 두 차례나 완공이 실패할 뻔했지만 신자들은 낮에는 성당을 쌓고 밤에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성당 완공을 위해 헌신했다고 한다.
박해 참극이 빚어졌던 ‘다카노스 신앙의 유산’ 근처에도 성당이 헌당됐다. 1880년 브렐 신부가 부임해 고아를 위한 양육시설을 설립했고 이듬해 다이노우라 성당(鯛の浦聖堂)이 세워졌다.
고토는 외진 섬이 많아 성당마다 신자 수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신앙을 지켜왔다는 자부심과 긍지는 그 어떤 곳보다도 높다. 순례단이 찾은 목조성당인 구 고린 성당(旧五輪敎会堂) 신자는 마을에 사는 가족 4명이 전부다. 이들 중 한 명인 사카타니 사치코(마리아·77)씨가 반갑게 순례단을 맞으며 빵을 선물했다. 국경을 넘어 신앙으로 하나되는, 그 따스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에가미 천주당(江上天主堂)도 현재 신자가 단 2명이지만 그 옛날 신자들은 스테인글라스를 손으로 직접 만들고 기둥과 문에 나무문양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고토 순례 마지막 날인 3월 19일 오후 순례단은 아오사가우라 천주당(青砂ヶ浦天主堂)에서 조환길 대주교 주례로 미사를 드렸다. 미사에는 현지 일본인 신자 10여 명도 함께 자리했다. 조 대주교는 “고토 지역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사제로서 신자로서의 소명을 다 함께 생각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감회를 전했다.
▲ 신자가 단 2명에 불과한 에가미 천주당. 내부는 신자들이 직접 나무문양을 그려 넣어 꾸몄다.
▲ 3월 19일 일본 고토 아오사가우라 천주당에서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주례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 고토는 어떤 곳?
고토(五島)는 나가사키 현 서쪽 동해와 동중국해 경계에 있는 5개 큰 섬을 중심으로 140개 섬으로 이뤄진 열도다. 중심이 되는 5개 섬은 다시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뉜다. 위쪽에 있는 와카마쓰시마(若松島)와 나카도리시마(中通島)를 ‘위쪽 고토’라는 뜻의 가미고토(上五島)라고 부른다. 아래쪽에 있는 후쿠에시마(福江島)·히사카시마(久賀島)·나루시마(奈留島)를 ‘아래쪽 고토’라는 뜻으로 시모고토(下五島)라고 칭한다.
나가사키 현에 있는 130여 개 성당 중 50개의 성당이 고토에 있다. 가미고토 총 인구 중 약 25%는 가톨릭 신자일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곳이다. 선조의 신앙을 지키려는 열정이 큰 것이 일본인들의 특성이라 성당이 있는 곳에는 가톨릭 신자가 많고, 없는 곳에는 불교 등 여타 종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 바로잡습니다
3월 27일자(제2987호) 14면 ‘일본 나가사키·고토 성지순례(상)’ 기사에서 ‘53세 일본인 고이치 디에고와 40세 조선인 카이요’는 각각 ‘40세와 53세로, 카이요가 일본 205위 복자와 함께 시복된 날짜는 1867년 7월 7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