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이었으니까 젊었을 때 일이다. 기도회 석상에서 사도 바오로의 ‘신앙생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신자가 “무슨 말씀을 그따위로 하세요?”하는 것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그 큰 소리에 나는 하도 당황스러워 “뭐가 그따위란 말입니까?”하고 대꾸했다. 그게 사단이 돼 그분은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교포 공동체를 도와줄 때 일이었다.
3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 때는 정말 화가 나고 괴로웠다. 생각이 잘 통제되지 않았다. 생각만 혼란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먹는 것도 소화되지 않아 색만 변한 채 쏟아냈다. 마음이 상하니 몸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며칠을 그러다 견딜 수 없어 성당에 들어가 예수님께 한껏 넋두리를 쏟아냈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때서야 나는 “왜 일이 이렇게 꼬였을까? 평시에 아무 탈 없이 친하게 지냈던 그분이 왜 내게 그랬을까?”하면서 그분의 입장과 내 반응에 대해 좀 냉철하게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성을 되찾은 셈이다. 감정도 어느 정도 해소됐기에 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평시에 그분의 불만을 들었지만 나와 관련된 일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기도 쉽지 않아 그냥 넘겨버리곤 했다. 그것이 그분에게 실망과 분노를 가져온 것이었다.
나는 내 반응에 대해 그분과 공동체에 사과했다. 그때서야 정말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나는 그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때 나는 “이제부터 모든 것을 잃어도 마음은 잃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지금도 내 마음의 평화를 우선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평화를 축복하셨던 모양이다.
번뇌란 진실을 찾지 못한데서, 증오심은 화가 강화돼 마음에 뭉치는데서, 분노는 참지 못해 폭발시키는 데 있기에 비인간적이 돼 자신과 다른 이를 파괴하게 된다. 우리가 지닌 내적 혼란, 가정의 갈등, 사회 분열 모두 다 그런 화와 분노, 증오심이 쌓아온 결과다. 인간이 비인간이 되는 순간은 그럴 때 생겨난다. 영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인간은 짐승이 된다. 이익, 욕구만이 우선하게 된다. 마음은 지옥이 되고 관계는 파괴된다.
나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 감정을 해소하고 그분의 입장에서 돌아보기 시작했을 때야 그분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분에 대한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분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분이 한국에 입국해 법적인 문제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었을 때 찾아가 위로하고 그분이 돌아갈 때까지 사식을 넣었던 것이다.
번뇌, 증오심, 분노는 인간이 비인간이 되는 순간들이다. 우리는 지금 이성을 잃고 묵은 감정과 욕구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자신의 말과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다른 이에 대해 합리적 판단도 할 줄 모른다. 우리가 듣고 믿는 예수님의 가르침들이 우리 안에 뿌리 내려 영성화 되지 못한 채 믿음에 의지해 살고 있다.
인간 생명과 삶은 성숙에의 길이다.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인생의 가치 있는 열매를 맺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영적인 성숙과 성화 없이 구원은 없다. 자기 영성(마음)을 살펴보고 영적 성숙과 성화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요 진정한 신앙의 길이다. 우리 구원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