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의 어느 날, 저는 보병 소대장을 마치고 특전사령부로 전속명령을 받았습니다. 며칠 휴가를 보낸 후 불안한 마음으로 특전사령부로 향했습니다. 검은 베레모를 깊게 눌러 쓴 키 큰 위병들은 짧고 패기에 찬 목소리로 “단~결” 경례를 했습니다.
부대 안으로 얼마를 걸어가자, 커다란 돌 하나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돌에는 큼지막하게 일기당천(一騎當千)이란 고사성어가 씌어 있었습니다. 일기당천이란 ‘한 기병(騎兵)이 천 명(名)의 적을 당해 냄’이란 뜻으로, 특전요원 한 명이 적 천 명을 능히 감당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30여 년 전에 보았던 이 일기당천이란 고사성어가 요즘 저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항공부대는 다른 부대의 군인들에 비해 위험에 더 많이 노출돼 있습니다. 하늘을 난다는 것 자체가 벌써 큰 불안전요인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조종사들은 늘 안전을 생각하고 안전과 관련된 일에 촉각을 세웁니다. 따라서 비행임무가 계획된 날은 신경이 더 날카롭고 오감은 더욱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제 경험상, 전날 악몽이라도 꾸었다면 비행임무가 종료될 때까지 최고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근무하는 부대에서는 한 달 또는 격월로 종파별 안전비행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개최합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기도회를 할 때는 참석인원이 많습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군인가족만도 10명은 족히 될 듯합니다. 하지만 성당이나 법당에서 안전기도를 할 때는 참석인원도 적을뿐더러 군인가족들도 소수여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특전사에서 보았던 ‘일기당천’이란 사자성어를 떠올렸습니다.
저는 본당 사목회장을 4년 넘게 맡았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석하면 신자들이 적어서 신부님, 아니 하느님께 늘 죄송스럽습니다. 저와 아내는 개신교에 비해 신자 수가 현격하게 적은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일당백(一當百)을 하자’고 다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당백이 아니라 일기당천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입 초기에는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해 의욕적으로 전교활동을 전개했었습니다. 기지 내 신자 수를 확인해 보니 간부만도 50명이 넘었습니다. 신자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성당에 나올 것을 적극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주일에 성당에 나오는 장병과 가족은 30명 남짓입니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냉담한 지 오래됐다, 애들이 어려서 힘들다” 등 이유도 다양합니다.
결국 신부님과 저는 어렵지만 전교를 계속하면서 소수정예로 가자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르신 대로 너희를 위하여 친히 싸워 주셨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을 수 있었다(여호수아기 23,10)’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적은 수의 신앙공동체지만 특전요원들처럼 ‘한 사람이 천 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아멘!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안전관리실장 이연세(요셉) 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