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역사를 이어받아 설립된 왕림성당.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왕림리. 신앙선조들은 예로부터 이곳을 ‘갓등이’라고 불렀다. 교구 성소의 요람, 갓등이를 찾아가봤다.
‘갓등이’는 갓을 쓴 등불이라는 의미로 박해시대 교구에 살던 신자들이 ‘사제’를 비밀스럽게 부르는 말이었다. 그 말이 어느 새인가 이 지역의 교우촌을 일컫는 말이 됐다. 이미 기해박해(1839년) 이전부터 형성된 이곳 교우촌은 박해시대 국내에 잠입한 선교사제들이 서울을 향하기 전에 머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수원과 충청도를 잇는 좁은 산길에 자리한 교우촌은 중국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선교사제들이 머물다 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사제들이 머무는 곳인 만큼 교우촌의 신자들은 사제들을 더욱 철저하게 보호했고, 그런 교우촌의 특성에서 갓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갓등이 교우촌의 신앙공동체는 왕림본당 공동체로 이어졌다. 1888년 서울 명동본당에서 분리, 설립된 왕림본당은 교구 최초의 본당이다. 왕림의 신자들은 활발한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사업에도 나섰다.
본당이 세운 광성국민학교는 6·25 한국전쟁으로 폐교되고 말았지만, 그 터전은 더 큰 뜻을 이루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바로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교구 성소의 요람, 수원가톨릭대학교다. 우리나라에 파견되는 사제들이 머물다간 갓등이는 지금은 교구에 파견되는 사제를 양성하는 곳이 됐다.
한국교회 4번째 신학교인 수원가톨릭대의 건립은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여론은 ‘교구에 대신학교가 건립되면 기적일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특히 재정 문제와 교수진 확보가 난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교구는 “사제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외 교회의 실정”과 “무엇보다 북한·중국 등 공산권 국가 선교를 준비해야 할 한국교회가 성소자 발굴의 옥토”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서울의 대신학교 학생이 너무 많아 교육이 어려우므로 제4대신학교 건립”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주교회의는 1982년 교구에 새 신학교 설립을 결정했고, 교구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기념사업으로 설정, 그 장소로 왕림(갓등이)을 선택했다.
갓등이는 비단 교구 사제 성소의 요람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1985년에는 천주섭리수도회가 갓등이에 자리를 잡았다. 1988년 왕림성당 북쪽에 완공된 수녀원에는 모원과 함께 수련소가 있어 많은 이가 이곳에서 수도 성소의 길을 걸었다.
이어 1990년에는 왕림성당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한국외방선교회 수련원이 문을 열었다. 한국외방선교회는 사제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해외 여러 나라에 사제를 파견해 선교활동을 펼치는 선교회다. 한국외방선교회는 1984년부터 소속 신학생들을 수원가톨릭대에서 교육시켜오다, 신학원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제 양성에 나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청소년·청년들이 신앙을 배우고 하느님을 만나도록 교구가 마련한 ‘갓등이 피정의 집’도, 그리스도의 사상을 연구해 한국교회가 내외적으로 충실히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도 이곳 갓등이에 자리하고 있다.
선교를 떠나는 사제들의 보금자리 갓등이 교우촌은 세월 속에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사랑하는 신앙선조들의 그 정신은 지금도 갓등이 안에 살아있다.
갓등이에 자리잡은 천주섭리수녀회.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