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숙 소설가의 집필실. 생전에 사용했던 책상과 필기구, 문학 서적들이 전시돼 있다. 출처 서울미래유산
진리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다
소설 「생인손」은 한무숙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계층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쇤네는 사직골 정 참판댁 누대 종의 딸년으로 태어나 언년이라구 불렸사와요.” 이 언년이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는 표 마리아 노파이다.
가톨릭 신자인 한무숙의 소설에서는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생인손」을 비롯해 「월운(月暈)」 「어둠에 갇힌 불꽃들」이 그러하다.
세계문학사에서 가톨릭문학으로 지칭되는 범주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호교적(護敎的) 성격이라든가 도식적 원리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신자 문학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면서, 문학예술로 작품성을 성취하면 가톨릭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은 원래 엘리트주의 성향이 아니다. 예수는 부자와 율법학자들이 아닌 갈릴래아 호수의 가난한 어부들을 사도로 삼았다.
한무숙의 소설 「월운」은 셋방살이하는 새댁의 아기 낳는 날 이야기이다. 뒷방 색시가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되고 문간방 아낙이 조산원 역할을 하는데, 평소에 어려워하며 모시던 집주인 홍 여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당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소외되고 기가 죽은 집주인은 느닷없이 여름 하루살이 떼를 생각한다. 단 하루 짝짓기를 하고 수놈들은 땅에 떨어져 죽고 암놈들은 알을 낳고 역시 죽는다는 하루살이. 주인 홍 여사는 셋방 해산날에 휘둘리면서 엄숙한 생명의 제전에 정화수를 떠놓고 축수하는 마음이 된다.
한무숙의 소설 「감정이 있는 심연」 「월운」 「생인손」.(왼쪽부터)
■ 빛을 향하여
「어둠에 갇힌 불꽃들」은 불행한 맹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고아원 앞길에서 큰 싸움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싸우는 사람들은 서로 한치의 양보가 없었다. 험한 말을 구정물처럼 퍼부어 가며 마구 치고 때리고 차고 밀었다. 눈먼 고아들은 공포로 떨며 그 모양을 듣고 있었다.
안나가 오돌도돌 떨면서 병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사람들 왜 싸워요?
글쎄, 생각을 잘못하는 사람들 같군.
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생님, 저 사람들 눈뜬 사람이에요? 못 보는 사람이에요?
병호는 어리둥절하며
보는 사람이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왜 싸워요? 앞을 볼 수 있어도 불평이 있어요? 무슨 불평이 있어요. 앞을 볼 수 있는데.
맑고 고운 눈에 눈물이 피잉 돌았다.(안나는 소위 청맹으로서, 앞을 보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면서 보이지 않는다.) 병호는 그녀의 작은 몸을 꼭 껴안아 주었다.”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며, 소유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본다는 것은 밝은 빛을 향하는 것이다.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말했다. “진리도 빛을 향해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고 빛을 향해 다가가는 데에 구원이 있다. 한무숙의 이 소설은 불편하고 불행한 맹인사회 삶의 온갖 구체적 여건을 최대한 충실하게 밝혀 보임으로써, 작가로서의 장인의식까지 드러낸다. 그 불편 속에서도 상상하는 존재 인식을 긍정하게 한다.
작가 한무숙은 섬세하고 세련된 감수성도 지니고 있다. 「감정이 있는 심연」이 그러한 작품이다. 그는 6·25 전쟁 후의 상처 깊은 상황에서도 남녀의 사랑과 그 의미를 성찰했다. “그런데 다아 지나가 버리고 마는 거지요” 하는 체념과 달관 같은 것까지 풀어낸다.
그러나 한무숙은 결코 허무로 끝내지도 않는다. 이것이 가톨릭 작가로서의 그의 본색이다. 「우리 사이 모든 것이」가 그 작품이다. 체험의 기록인 점도 있어 그 의미의 진정성도 더 짙다.
착하고 성실한 청년, 사랑하는 아들이 먼 이국에서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차라리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일이 없다. 존재는 귀하고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좋은 것이다. 너 까닭에 이 괴로움, 이 아픔을 갖지만 너는 태어나야 했고 많은 추억을 남겨 주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슬픔과 아픔도 남겨야 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요제프 라칭거)은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말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사랑의 우세(優勢)인 것이다. 다른 인간 안에 계속 머무름으로써만 존속이 가능하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구중서(문학평론가)
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해 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주간, 수원대 국문과 교수,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문학과 역사의식」, 「한국천주교문학사」 등이 있다.
구중서(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