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자 칼 라너
독일 출신의 예수회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신부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신학자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칼 라너 신부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나서 갓 스무 살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예수회원으로서의 양성과정과 함께 학문의 길에도 정진해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이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신학박사 및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는 1984년 인스부르크에서 선종할 때까지 신학교수로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자문역으로서, 또한 공의회 이후 교회상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한 대학의 영역을 넘어서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현재 새롭게 출판 작업 중인 방대한 「전집」(독일 헤르더 출판사)에 담긴 그의 수많은 저서, 논문, 기고 등과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현대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여러 사전들과 학술지, 편람 등을 통해 오늘날에도 그는 교회의 신학과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또한 칼 라너 신부 자신이 그의 저술들의 근본 동기가 ‘사변적 관심사가 아니라 현대사회에서의 복음선포라는 사목적 열망에 있다’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교회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쇄신되기를 원하는 많은 교회 내 구도자들과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칼 라너는 교의신학과 기초신학 분야에 있어서 탁월하고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목신학과 교회일치 신학, 타종교와의 대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종교신학 분야들에 있어서도 큰 획을 긋는 연구를 남겨놓았고 귀중한 통찰들을 전해주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그의 초기 저작들인 두 편의 종교철학에 관한 저서, 「세계 내 정신」과 「말씀의 청자」 역시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되는 의미 있는 유산입니다. 이 두 편의 작품을 통해서 그는 현대 신학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학을 인간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청자’인 인간의 주관적 측면과 경험을 깊이 고려함으로써 계시의 깊은 의미에 다가서는 시도이며, 역사와 현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살아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구도의 여정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인간의 초월자를 향한 본성적인 열망과 정향에 대한 자기 이해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장인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긍정을 통해 새롭게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종교철학적, 기초신학적 기초 수립을 위해 칼 라너는 ‘마레샬 학파’가 지향했던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초월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의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학과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였고, 당시 가장 주목받던 현대 철학이었던 철학자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개진하는 인간학을 받아들였습니다.
■ 일상과 신비
이러한 그의 관점은 사변적이고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초월’을 향한 부름을 세상에서의 도피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유보된 관상적 삶의 양식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응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초월은 신비를 의미하며, 신비에 다가서고 응답하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신비가’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 라너 신부의 생각이었습니다.
20세기 중반기를 풍미한 프랑스 문화계의 거물, 작가이자 드골 시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21세기는 영성의 시대가 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에 온 인류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추구가 없다면 물질문명과 폭력, 국가주의 속에서 세상의 미래가 암울해질 것이라는 염려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라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신비와 만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하느님 체험의 본질이며, 이것 없이 외적인 제도와 형식 ‘소시민적인’ 자기만족의 방편으로서의 종교 생활만이 남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다”라는 라너 신부의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고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라너 신부는 신비체험이 그리스도인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며 또한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자,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초월을 향한 본원적 갈망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우리가 쉽게 연상하게 되는 특이한 은사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체험들과 사건들 안에서 신비체험의 본질을 보려 합니다. 라너 신부는 영성에 관한 독립된 대작을 내어 놓지는 않았지만, 그의 수많은 피정 강의를 위한 글들과 묵상서들 속에서 라너 신부가 스스로 살아왔고, 신앙의 벗들에게 권해주는 영성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장익 주교의 아름다운 번역으로 출간된 「일상」(분도소책 1, 1980)입니다. 이 책에서 라너 신부는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어구를 머리말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일상이 먹고 마시고, 살아가기 위한 하루하루의 노고와 잡다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럼에도 일상의 영적 의미에 대해 차분한 마음으로 시간을 가지고 묵상해보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일들에 대해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각자의 신앙에 있어 매우 긴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일상을 받아들이고 그 하찮음과 성가심까지도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면하라고 권고하면서, 그러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신비와 접점을 가지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담박하고 성실하게 받아들여진 일상은, 바로 일상으로 머무는 이상, 우리가 하느님과 그의 숨은 은혜라고 부르는 저 영원한 불가사의와 무언의 신비를 담고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인데, 이러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실현은 관념과 자아성찰에서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체험하는 구체적인 행위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일상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노래하듯, ‘영원의 전조’를 담고 있는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