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생가를 찾은 한무숙 소설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소재는 정약용 일가
가톨릭 작가 한무숙은 생애의 만년에 장편소설 「만남」을 발표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조카 정하상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다산은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남인 실학파 안에서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을 계승한 것이다. 이들은 경기도 광주(廣州) 지역에 살았다.
정하상은 다산의 바로 손위 형이며 조선 천주교 초기교회의 평신도 회장 정약종의 아들이다. 정하상은 아직 성직자가 없던 조선의 자생적 교회에서 중국을 통해 신부를 영입하는 운동을 추진해 조선교구가 설정되게 한 공로자이다. 그리고 정약종과 정하상의 가족은 모두 순교를 했다. 다산 정약용은 초시 합격 후 「진리본원」 「성세추요」를 비롯한 천주교 신심서들을 연구하느라고 6년 동안 대과 급제를 미룬 일이 있다.
다산은 그의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서 나라의 신앙 박해 정책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순교는 면하고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형 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병이 들어 선종했다. 이들은 모두 신앙에 대한 박해 아래서 가시밭길을 걷는 삶을 살았다.
다산은 강진 유배에서 돌아온 후 마재 고향 집에서 노년기를 보내고 선종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의 정신적 편력은 우리 민족의 역사 안에서 가장 폭넓고 심오한 사상의 경지를 이루었다.
소설 「만남」의 서두는 다산의 유배지 강진에서부터 시작된다. 강진의 다산 초당에 인접한 고을인 해남 대둔산의 대흥사 혜장 스님의 입적 다비식이 첫 장면이다.
선승(禪僧)인 혜장은 유교에도 밝았는데 음주 육식 여색에도 구애 없는 무애사상의 분방한 수행자였다. 이러한 설정은 작가 한무숙의 역사소설 「만남」이 결코 어떤 교조적 정신 틀에 갇히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 소설에는 무당 굿판의 무가 부분들도 보인다. 이 나라 토착문화의 원천에서부터 이야기를 열어 가는 것이다.
하물며 다산 일가에 얹혀있는 천주교 신앙은 서학(西學)이라고 부르듯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 그 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헤아려질 수 있는가.
■ 민족문화의 중심
다산은 동양의 학자로서 유교의 후기 철학인 성리학이 공리공론(空理空論)의 관념에 치우치는 데에 대립하는 실학의 지성인이니 문제는 더욱 벅차기만 하다.
천주교는 서양 신부들이 중국에 들어와 선교를 하면서 신앙 교리를 한문으로 써서 발행한 책들을 중국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이 구해서 가지고 와 민간에 알려지게 된다. 천주교 서적으로 대표적인 것이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 서학서들이 한글로 번역도 되면서 대중 속에 전파되어 갔다.
천주실의에서는 원래 동양에 있는 ‘상제(上帝)가 천주교의 하느님과 같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식물과 짐승에게는 없는 ‘영혼’이 있고,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했다. 또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대로 태어나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평등하다고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 땅의 백성들이 내세에라도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소망을 지니게 되었다. 박식한 다산은 원래 성리학에서 ‘태극’(太極)이 우주의 근원이라고 하는 이론을 믿지 않았다. 인간의 영혼에 소통하지 않는 태극이 어떻게 세상을 섭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비판은 성리학에 의거하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혁명과 같은 충격이었다.
다산은 성리학 대신으로 동양의 고대 ‘상제’가 인간과 소통하면서 나라의 임금보다도 상위에 있는 섭리자 하느님이라고 인식했다. 다만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한 데 대해서는 다산이 반대했다. 제사 금지는 교회 쪽의 오류였고 1939년에 금지 방침을 해제했다.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평등과 영원에 진입하는 영혼을 믿은 순교의 행렬은 그것대로 장엄한 역사였다.
소설 「만남」 안에서는 정하상의 일가와 교우들의 일관된 신앙이 돋보인다. 다른 인간상으로는 권진사댁 종인 승낙종의 악행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작가는 죄의 동기에 연민의 정을 베풀어 놓았다.
다산도 한때 떠나 있던 신앙에 돌아와 유방제 신부로부터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한다. 다산은 학자요 시인이고 민족문화 정체성의 중심으로서, 한무숙의 소설 「만남」 안에서 온갖 가치의 총화를 이루고 있다.
구중서(문학평론가)
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해 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주간, 수원대 국문과 교수,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문학과 역사의식」, 「한국천주교문학사」 등이 있다.
구중서(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