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구 이곳저곳] (10) 둔토리 동굴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 박해 피해 숨어살던 곳
청계산 숲 속 바위 틈에 기거
밤엔 교우촌서 신자들 보살펴
26세에 체포… 새남터서 순교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청계산에 위치한 둔토리 동굴.
경기도 의왕과 과천, 성남의 경계를 이루는 청계산. 청계산 국사봉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약 1㎞ 가량 가면 ‘둔토리 동굴’이라고 불리던 작은 동굴이 나온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한국 이름 ‘서몰례’(徐沒禮))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동굴이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다 하여 ‘청계’(淸溪)라는 이름이 붙여진 산. 지금은 도시와 인접해 많은 등산객들이 찾고 있지만, 불과 1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 곳이었다. 그래서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이 청계산 자락에 모여 살았다.
높은 산과 울창한 숲에 가려진 이 산 인근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청계산 남쪽에 자리한 하우현 지역에서 신유박해(1801년)와 병오박해(1845년) 때부터 신자들이 체포되고 순교한 기록이 등장해 박해초기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짐작된다.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이 이곳에 온 이유도 신심 깊은 신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1840년 프랑스 보르도교구의 랑공(Langon)에서 태어난 성인은 1857년 보르도 신학교에 입학해 부제품을 받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다. 1864년 사제품을 받음과 동시에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사제품을 받은 해 7월 프랑스를 출발한 성인은 열달이 넘는 긴 여정 끝에 1865년 5월 22일 충남 내포지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그는 바로 조선말을 공부하기 위해 둔토리 인근 교우촌에 자리 잡았다. 박해가 심하던 시기였기에 집에 머물지 못하고 깊은 산속 동굴에서 생활했다.
성인이 생활했다고 하는 이 동굴은 ‘동굴’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울 정도로 좁은 바위틈이었다. 높이 1m, 너비 3.2m 가량 되는 입구를 들어서면 높이 1.2m에 너비 4~5m 정도 되는 공간이 나온다. 성인 남자는 허리를 펴고 서 있기도 힘들고, 너비가 4~5m라고는 하지만 바닥이 울퉁불퉁해 실제 공간은 한두 명이 누울 정도가 고작이다.
게다가 여느 동굴이 그렇듯이 습하고 차가운 한기가 느껴져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차가운 동굴에서 성인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하느님 사업에 뛰어들었다.
성인은 이곳에 숨어 단순히 조선말을 배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밤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을 내려가 신자들을 찾았다. 박해 속에서 사제의 보살핌 없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신자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성인의 열정 덕분이었을까. 성인은 1866년 2월경에는 성무를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조선말에 능숙했다고 한다.
이에 베르뇌 주교는 성인이 경기도 광주에서 사목활동을 하도록 소임을 맡겼다. 하지만 성인은 임지로 채 떠나기도 전에 밀고로 인해 둔토리에 있는 한 신자의 집에서 체포되고, 26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순교할 당시 성인의 모습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체포될 때도 굽힘이 없이 태연했고, 모진 고문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드러냈다고 한다. 꼭 그가 머물던 이 바위같다. 성인이 순교한 지 1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성인이 머물던 이곳은 변함없이 오늘날까지 남아 성인의 굳은 신앙을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성인이 머물던 이 동굴은 하우현성당에서 출발하면 도보로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성남 분당 운중동의 한국정신문화원 방면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30분 만에 오를 수 있지만, 현재 공사 관계로 등산로가 폐쇄돼 이용할 수 없다.
둔토리 동굴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산길 표지판.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