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장발 화백 (상) 한국 교회미술의 시작과 그 의미
1954년 성미술 전람회 열어 교회미술 초석 닦아
혜화동성당 건립 지휘
교회미술 발전뿐 아니라 ‘국전’ 창립하는데도 기여
우리나라의 ‘교회미술’은 1920년대에 우석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가 로마에서 있었던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참례하고 돌아와서 곧바로 서울 명동성당 열두 사도 상을 제작한 것을 시작으로 본다. 그 뒤 장발 화백은 골롬바·아녜스 자매상과 김대건 신부상 등을 계속해서 그려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교회와 성 미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을 시대에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러한 일을 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은 없다. 1920년대라고 하면 서양에서도 예술가가 ‘교회미술’에 손댄 일이 없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1940년대 들어서면서 어떤 한 신부의 발상에 의해 프랑스 앗시라는 시골에 현대 미술가들을 초대, 그 결과 새로운 성당이 탄생했다. 이어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서 현대의 교회가 현대 미술가들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하겠다는 선언이 있었다. 그런데 장발 화백은 1954년에 이미 서울에서 현대 미술가들의 성미술 전람회를 주도했다. 1959년에는 혜화동성당이 건립되었는데, 이 성당은 한국 건축가에 의한, 한국의 조각가들에 의한, 한국 자본에 의한 최초의 성당이었다. 이것이 모두 장발선생이 주도한 일이었다. 한국의 교회미술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1965년에는 절두산성당이 만들어졌다. 건축가 이희태 선생이 설계하고, 조각가 김세중 선생과 최의순 선생이 참여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 성당이 탄생했는데, 프랑스에서 꼴뷔제 성당(1950년)이 세워진 것처럼 한국에서는 절두산에 새로운 획기적인 성당이 세워졌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970년에는 서울가톨릭미술가회가 창립됐고,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 미술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금은 전국의 각 교구마다 미술가회가 만들어져, 해마다 연구발표회를 열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세계적으로도 오직 한국의 가톨릭교회에서만 있는 일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한 해에 100개가 넘는 성당이 전국 각지에 세워지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미술가들이 나서서 한국 교회미술 현대화에 앞장섰다. 새로운 설계, 새로운 성상이 미술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 일은 지금 계속해서 추진되고 있다.
이 시대의 교회미술이 이 시대의 신앙을 상징한다고 한다. 종교미술이 성했던 시대에 신앙이 성했고, 신앙이 쇠했던 시대에는 종교미술도 쇠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들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하느님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없다. 예술가들의 창의성 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초자연계와 직관적 통교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을 통해서 그 너머의 세계를 감지할 수가 있다고 한다. 교회미술이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그런 때문이다.
화백은 만 100세를 넘기시고 2001년 4월 8일 멀리 이국땅에서 파란 많은 큰 생애를 마치셨다.
장발 선생이 미국으로 가지 않고 그냥 이 땅에서 사셨다면 한국 교회미술은 눈부신 발전을 했을 것이다. 그의 준엄한 평가의 정신이 부당한 사례를 용서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해마다 수십 개의 성당을 신축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세계교회 안에서도 매우 이례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써야 할 텐데, 그런 면에서 장발 선생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사정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 특히 미술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로 아쉬움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새삼 장발 화백의 역량이 한국미술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해방 후 십여 년 동안의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얼마나 폭넓은 활동을 했던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 이후 그가 한국을 떠나 자리를 비운 사십여 년간 한국 미술문화계에 미친 손실을 생각하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장발 화백은 미술대학을 창설하고 초대학장으로 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창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한국 미술가협회를 창설하고 ‘성미술 전람회’를 열어 한국 교회미술의 터전을 일구었고, 혜화동성당 건립을 지휘하면서 교회 건축에 최고 수준의 미술가들을 참여시킨 첫 역사를 만들었다. 또 예술원 부회장을 역임하고, 제1회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을 받는 등 그야말로 한국 미술을 주도한 인물이라 할 만큼 큰일들을 하셨다. 그가 본의 아니게 고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세월에 어찌 안타까운 마음을 접을 수가 있겠는가.
장발 화백은 확실한 조형 역량과 예리한 감식안의 소유자로 당대 누구도 그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그가 남긴 성화들을 볼 때면 이러한 역량을 보다 여실하게 읽을 수 있다.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했으면서도 일본풍 미국풍의 유화 냄새가 없는 것 또한 남달리 깊은 신앙심과 판단력의 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장발 작 ‘성녀 김효임 골롬바와 효주 아녜스 자매’.
최종태(요셉·조각가)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공주교육대와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1970년부터 30여년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각전을 비롯해 소묘전, 파스텔화전, 목판화전, 유리화전 등 국내외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영기념사업회 회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최종태(요셉·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