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리우드대학 미사 장면.
메리우드에서의 학교생활은 참 행복했습니다. 드디어 하고 싶었던 작곡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여러 가지 이론 과목들을 영어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화성학, 대위법 외에도 여러 작곡 기법들을 차근차근 배우고 이를 응용해 작곡 연습을 하는 일은 참 기쁜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점은 성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음대 졸업을 위해서는 누구나 졸업연주회를 해야만 했는데 교회음악 전공자는 모두 오르간 연주회를 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나 오르간을 전공한 사람들이 교회음악을 택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저는 오르간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2년 반) 안에 연주회를 할 만한 실력을 갖추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제 딱한 처지를 고려해 학장님과 교수님들은 아무 걱정 말고 성악으로 졸업연주회를 하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알폰소 수녀님으로부터 성악 지도를 받게 됐는데, 기초적인 자세부터 호흡, 발성까지 정말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덕분에 성악의 기초를 잘 다질 수 있었고 이 공부는 훗날 합창단을 지도하는데 아주 요긴한 밑거름이 됐습니다. 미국 대학은 학문에 있어 확실히 열려있는 공간이었습니다. 하루는 학장 수녀님이 제게 이런 요청을 하셨어요. “강 신부님, 한국음악을 전공했으니 우리에게 한국음악에 대해서 소개를 좀 해주면 좋겠어요. 1년에 한 번 외부 강사를 초대해 전 음대생과 교수진이 특강을 듣는 시간이 있는데 이번에는 한국음악에 대해 강 신부님이 맡아주었으면 해요.” 참으로 획기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학생에게 전체 교수진과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특강을 맡기다니요? 처음에는 얼떨떨하기도 하고, 영어에 자신도 없고 해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겁먹지 말고 맡아주면 좋겠다고 용기를 주셨어요. 그러면서 며칠 생각을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자신이 없었지만 수녀님 말씀처럼 한국음악에 대해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 용기를 냈습니다. 학장 수녀님께 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제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이 중 한 시간 반을 강의하고 30분 질문을 받기로 했어요. 드디어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떨리는 가슴으로 강단에 섰지요. 학장님의 간단한 소개와 함께 제가 인사를 드리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어요. 떠듬거리는 영어로 한국 음악의 역사와 특징, 음계와 장단 등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실제로 ‘진도아리랑’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먼저 ‘세마치’ 장단을 가르쳤는데 모두들 신기해하는 얼굴로 손장단을 치며 재밌게 따라 하더군요. 그리곤 한 소절 한 소절 제가 선창을 하며 따라 부르게 했는데 모두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나았네~에에에” 하며 아주 우렁차게 진도아리랑을 따라 부르는 거였어요. 그리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생각 외로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아리랑’의 뜻이 무엇이냐? 한국에서 무슨 전공을 했느냐? 한국에는 어떤 악기들이 있느냐? 한국 성악과 서양 성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한국음악을 하는 사람이 왜 서양음악을 공부하러 왔느냐? 등등 질문이 계속 쏟아져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지요.
아무튼 이렇게 안 되는 영어로 진땀을 흘리며 무사히 특강을 마쳤습니다. 한 2주 지났을까 금발머리 여학생 하나가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나았네~에에에” 하고 흥얼거리면서 복도를 깡충깡충 뛰어가는 거예요. “역시 우리 음악은 중독성이 있구나” 하면서 혼자 웃었습니다.
강수근 신부(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 한국관구장)
1992년 사제로 서품됐다. 미국 메리우드대학 음악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로마 교황청립 성음악대학 작곡과를 수료했다. 현재 국악성가연구소 소장과 우리소리합창단(서울) 담당 사제를 맡고 있다.
강수근 신부(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 한국관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