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너 신부에 의하면 이처럼 일상 안에서 은총 세계를 지각하고, 영에 따른 결단을 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실존의 중심을 이루는 ‘일상의 신비’를 사는 삶이라고 말했다. 출처 www.karl-rahner-archiv.de
■ 정신, 초월, 은총 ? 신비 체험의 삼중적 구조
칼 라너 신부의 묵상서 「일상」의 마지막 장인, ‘일상에서의 은혜(은총) 체험(Von der Erfahrung der Gnade im Alltag)’은 ‘일상의 신비’를 일깨우는 라너 신부의 영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여러 번 읽고 숙고하며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는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의도가 아니라 평범한 독자들의 영성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영적 강화와 같은 성격의 글이지만, 읽을수록 기초신학, 성령론, 은총론과 관련된 라너 신부의 심오한 신학과 철학 사상이 깊이 배어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라너 신부는 이 글에서 ‘일상의 신비’를 추구하는 신학과 영성이란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되 일상의 삶이 필연적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피상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매일매일의 구별되지 않는 ‘모든 날’(독일어로 ‘일상’의 문자 그대로의 뜻 All-tag)에서 ‘하느님의 날’로 상징되는 ‘영원’의 의미를 발견하는 노력임을 삼중의 구조 속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일상의 영성’은 우리가 즉자적이고 자기애적 차원에서만 일상의 경험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정신적 존재로서 체험하고 살아가는 결단을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를 라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완전히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일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 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는데도,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기막힌 바보짓을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몰아적’이라든가 떳떳하다든가 하는 느낌의 갚음마저도 없이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칼 라너, 「일상」, 장익 옮김, 분도출판사, 41-42쪽)
이어서 라너 신부는 이러한 정신적인 것의 체험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영원’과 관계 맺고 그리로 자신을 투신하는 모험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활 체험 가운데서, 바로 내게 일어난 경험들에서 정신을 찾아보도록 하자.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정신을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정신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의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다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인 것이다.
…실로 정신으로서의 인간이란, 단지 사변적으로뿐 아니라 실존적으로 신과 세계, 시간과 영원의 접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가를, 정신이 혹 인간적 생활양식의 수단에 그치지나 않고 있는가를 재삼 확인하려는 것이다.”(같은 책, 43쪽)
우리가 라너 신부의 전체적인 신학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말하는 영원에 대한 내적 의식은 다름 아니라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초월의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신적이고 초월적 차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선을 추구하고 일상의 깊은 의미를 길어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기에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라는 라너 신부의 기본 사상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근본 체험을 은총의 사건으로 체험하는 특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상의 신비란 궁극적으로 영 안에서의 자유를 체험하는, 결코 요란스럽거나 특정한 은사에 매이지 않은 성령의 체험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이처럼 정신을 체험한다면, 적어도 믿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사실상 이미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다… 정신의 이런 체험에 있어 우리가 자신을 아주 내맡긴다면, 손에 잡히는 것, 내보일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죽음 같은 암묵에 잠겨 죽음과 멸망의 맛을 띠게 될 때면, 아니면 모든 것이 마치 희고 무색이고 잡히지 않는, 무어라 형언 못할 열락 안에 녹아 버릴 때면, 우리 안에 작용하는 것은 정신뿐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가 아는 때가 온 것이다. 자신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섭도록 깊은 심연이, 그의 무한성이 우리에게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다 내주어 더는 자기에 속하지 않을 때, 자신을 거부하여 더는 임의로 처신하지 않을 때, 만사와 자아가 우리로부터 한없이 멀리 물러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자신의 세계, 은혜와 영생의 하느님 세계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같은 책, 44-45쪽)
■ 신비 안에 존재하는 인간, 일상 안에 살아가는 인간
라너 신부에 의하면 이처럼 일상 안에서 은총 세계를 지각하고, 영에 따른 결단을 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실존의 중심을 이루는 ‘일상의 신비’를 사는 삶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초월에 개방하는 정신적 태도 표명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라너 신부는 이미 자신의 초기작 「말씀의 청자」에서 인간을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자유로우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정신’으로 규정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세계의 의미를 인간의 관점에서, 편에서 예단하거나 조작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자유로우신 하느님의 계시를 ‘듣는 이’로서 존재하며, 초월과의 만남으로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조건 없이 긍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결코 이러한 근원적인 초월 경험 없이 획득될 수 없습니다. 이는 드물지 않게 삶 가운데 의미의 부재 속에서도 인내로이 그 시간을 견디는 자세를 요구합니다. 라너 신부가 「말씀의 청자」에서 전하는 통찰을 음미하며 일상 안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로 다짐해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니라 성령에 따른 삶이자 성령 안에서 자유로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만일 자유로운 분이신 하느님께서 계시하지 않고 침묵하길 원하신다면 하느님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서 자신의 정신적 및 종교적 실존의 궁극적인 최고 자기실행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칼 라너, 「말씀의 청자」, 김진태 옮김,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