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 화백(가운데)이 최종태 교수(오른쪽)와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석 장발 화백이 삶의 마지막 여정을 보낸 곳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라는 도시였다.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좀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는데, 마을 이름이 폭스 채플이라 했다. 크고 작은 연립주택들이 듬성듬성 있어서 공기 좋고 산책하기에도 적격인 동네였다.
마침 서울대학교에서는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이라는 상을 만들었는데, 장발 화백이 그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장발 화백이 창설한 미술대학에서는 흉상을 제작해 학장실 바깥마당에 세우고 여러 동문과 제자들이 모여서 제막행사를 했다. 휘문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였던 박갑성의 의미심장한 연설은 장내를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제막 행사가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츠버그를 방문할 일이 생겼다. 덕분에 모든 사진자료와 그 밖의 기념품 등을 선생에게 전달하는 일이 나한테 맡겨졌다. 실로 오랜만에 선생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의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당시 장발 화백은 아흔다섯 살이라는, 드문 나이를 살고 있었다.
내가 폭스 채플 그 언덕 마을의 장발 화백 댁을 방문했을 때 뉴욕에서 셋째 아들 장흔 신부가 와 있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귀가 어두워서 통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대면해서는 대화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할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그의 모습을 보자 대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장발 화백의 자택 응접실 뒤편에 병풍이 하나 잘 표구된 상태로 있었다. 노수현, 장우성의 작품 등 여섯 쪽은 더 되어 보였다. 이건 누구 그림이고 저건 누구 그림이고 그림 설명을 하시는데 흐트러짐 없이 모든 말씀이 명명백백했다. 애제자 김종영 조각가의 선종 소식을 전했더니 대뜸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서울에서 가지고 간 흉상 제막행사의 사진들을 펼쳐 놓았는데, 대부분의 얼굴들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이 얼굴은 누구이고 저 얼굴은 누구이고 하나하나 일러드렸더니 그야말로 감격 또 감격하는 모습이었다.
사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제자들이 모두 늙어 백발노인인지라, 장발 화백 또한 세월의 무상함과 옛 생각에 그야말로 흥분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김대건 신부와 명동성당 그림을 그릴 때, ‘성미술전람회’ 때, 혜화동성당을 만들 때의 일화 등 나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산더미 같이 안고 있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흔 신부에게 몇 가지 메모를 남겨 주면서 대신 여쭤봐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하지만 궁금한 부분을 차근차근 들을 수 없었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마음이다.
집에는 소파가 있고 그 옆쪽으로 식탁이 있었다. 장발 선생이 앉아 있는 뒷벽에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가족 그림이었다. 식탁 뒤편 한가운데에 십호쯤 될까 명륜동 집을 그린 그림 안에는 옛날의 부인과 누구누구 식구들이 그려져 있었다. 순간 묘한 감정이 들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은 가고, 타향 이국땅에서 고향 생각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을 내가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중 삼위일체 그림은 꽤 커 보였는데, 성부 성자 성령이 한복에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림 속에는 조그마한 골롬바 아녜스도 있었는데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 작품은 장발 화백이 80대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었다. 멀리 봄안개 너머로 남대문이 보이고 성녀의 가는 길가에는 꽃들이 예쁘게 그려져 있었다. 한 번은 여름 가톨릭미술인들과 이탈리아 새 성당 순례를 하는 중에 로마의 한인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게 됐는데, 거기에 장발 선생의 골롬바 아녜스 그림이 한 장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꽤 큰 그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발 화백의 골롬바 아녜스를 내가 본 것만 해도 석 장이 되었다. 아마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육자로서의 장발, 화가로서의 장발, 가톨릭미술가로서의 장발, 그는 여러 면에서 특출한 일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장발 화백의 생애를 돌아볼 때에 그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한국 교회미술 토착화에 가장 괄목할 만한 공로를 보인 인물이다.
1920년, 스무 살의 나이에 어떻게 ‘김대건 신부상’을 그리려는 마음을 먹었을까. 이 작품은 오늘날 한국 교회미술을 융성하게 하는데 씨앗이 되었다. 오늘날 비서구권 전체에서 가톨릭 교회미술의 토착화가 한국만큼 성숙한 나라는 드물다. 그것이 장발이라는 한 청년이 스무 살 때 그린 성화상 ‘김대건 신부상’으로부터 시작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신의 섭리란 사람의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 성싶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쿠튀리에 신부가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성당 만드는데 끌어들여 현대 종교 미술을 탄생케 한 것처럼, 장발 화백은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미술의 고급화를 선도하고 그것을 이 땅에 정착게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
최종태(요셉·조각가)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공주교육대와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1970년부터 30여 년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각전을 비롯해 소묘전, 파스텔화전, 목판화전, 유리화전 등 국내외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영기념사업회 회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최종태(요셉·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