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말 격언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善)이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가치 있는 것일수록 소중히 여긴다. 반면에 가치 없는 것, 필요 없는 것은 버린다. 그래서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하면 가장 모욕적인 욕이 된다.
쓸모가 큰 사람일수록 대우 받고 존경받는다. 얼마나 유익하고 필요한 존재냐에 따라 그의 존재 가치가 평가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고 유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우울증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우울증은 자기 스스로가 “나는 쓸모없는 놈이오”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자기 존재 가치 상실이 우울증의 핵심 이유다.
최근에는 초등학생,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우울증을 앓고 자살이 증가하고 있으니, 우리 현실이 얼마나 열악하다 하겠는가? 가족이나 친지 등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소홀히 여기고 배려하지 않으니 그 어린 아이들까지 존재감을 상실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당 교리 반에서조차 모두가 소중함을 가르치지 않고 교리만 가르치려 하니 어디서 인간 존엄성을 배울 수 있겠는가?
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이용하려만 하지 소중하게 보살피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자기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지 못하면 우울증이나 분열증을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주변에 우울증 환자가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한참 ‘참인간 교육’을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상담을 지원할 때 한 30대 남자가 상담하러 왔다. 첫 눈에 보기에도 깊은 나락에 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부님, 저는 살 의욕이 없습니다. 살아야 할 가치도 느끼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암담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을 살려낼 수 있을까?’하는 우려감이 들었다.
나는 그럴 땐 가만히 속으로 기도한다. “예수님, 나는 이 사람을 치유할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와주세요.” 그리곤 차근차근히 그의 세계에 접근해 간다. 그러다 보면 그를 이해하게 되고 그의 내면에 공감돼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게 된다. 그러나 내가 가슴 아파하고 그의 내면에 진심으로 함께 하기 시작하면 그의 마음은 점차 기력을 찾기 시작한다. 나는 그가 아주 작은 일, 밥 먹고, 옷 입고, 사람 만나는 일에서까지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이렇게 그가 자기 일상사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생명력은 다시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그는 활기찬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향해 서는 데서 자기 삶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많이 가지고, 멋 내고, 으스대며 지시한다고 해서 자기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가치를 창출해 갈 수 있느냐?”가 자기 존재 가치를 높여준다. 그것이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의 길이다. 하느님도 그런 사람을 축복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다. 예수님을 보시라. 인류를 위한 희생이 세상을 밝히고 사랑의 길을 열어주시어 영광스럽게 되지 않았는가?
하재별 신부 (원로사목자·사랑과 평화 생활실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