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 선생의 총지휘감독을 통해 한국 사람의 설계로, 한국 사람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현대식 건축물인 서울 혜화동성당.
장면·장발 형제는 미국에서 프란치스코 제3회원이 되어 귀국했다. 장발 선생은 만 백 세 생신을 지낸 지 며칠 후 선종하셨는데, 나는 당시 혜화동성당에서 추모미사를 준비하던 중 제3회 회원들이 걸어온 전화통화 덕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 프란치스코 제3회의 뿌리를 심은 분들이 장면·장발 형제였다니! 한국 천주교가 평신도들에 의해서 전래된 것처럼, 평신도 수도회 또한 그렇게 평신도에 의해 한국교회에 전해진 것은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장익 주교가 번역한 「프란치스꼬 저는」이라는 책의 맨 앞에, “참다운 방지거 제3회원으로 사신 부모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적혀 있는 한 줄 속에, 제3회의 도입과 확산 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한국 교회미술의 초석을 놓고, 국내 서양화단을 이끈 선구자이자 교육자로 존경받는 장발 화백은 1901년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서양회화 양식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하기 위해 1920년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서양의 조형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듬해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동경 미술학교 재학시절 ‘김대건 신부상’을 그렸고, 1926년에는 명동성당 제단벽화를 그렸다. 그의 깊은 신심은 이후로도 신의주성당의 벽화 ‘성령강림’(1928), 서울 가르멜 수녀원의 제단화 ‘성모영보’(1945)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1941) 등 다양한 성화를 그리게 했다. 장발 화백은 미국에서 추상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예전과는 또 다른 성화 작업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장발 화백은 일반 미술계에서는 초기 추상미술의 흐름을 이어온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비정형의 조형미 탐색을 통해 추상표현주의를 구축해왔고, 1962년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한 후에는 그만의 독특한 작업 세계를 선보였다. 1950년대 초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으로 선출됐던 장발 화백은 국전 운영을 계속 주도하면서 1960년까지 한국미협전을 열어, 우리나라 미술계의 종합적 발전에 이바지했다.
1958년에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해방이 되고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을 만든 이가 바로 장발 화백이다. 그는 서구식 미술 교육제도를 확실하게 다져놓고, 이로써 한국미술의 부흥에 절대적인 계기를 이룩했다. 지금도 전국의 미술대학이 장발 화백이 세웠던 교육과 이념의 기본 틀을 지키고 있다. 예술은 진리 탐구의 일환이라는 것이 그 근간이다. 바로 삶과 예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1955년에는 ‘성미술전람회’를 만들자, 서울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출품을 했는데, 이 전람회는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 미술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장우성 화백 또한 장발 화백의 권유에 의해 성화를 그리게 됐다. 장우성 화백이 한복을 입은 한국 사람의 얼굴로 된 최초의 성모자상을 그린 것도 다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역시 장발 선생의 총지휘감독을 통해 한국 사람의 설계로, 한국 사람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현대식 건축물인 서울 혜화동성당이 탄생했다. 이는 한국 교회미술계의 큰 성과일 뿐 아니라, 신앙의 토착화란 면에서도 크나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60년 4·19 학생 혁명이 발생하고 장면 정권이 수립되면서, 장발 선생은 로마의 교황청 대사로 내정되었으나 이내 5·16 군사정권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좌절되었다. 이후 장발 화백은 한국 화단에서 공식 활동을 중단했고,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다.
장발 화백 작 ‘명동성당 제단벽화’ 부분.
장발 화백은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이십 년 후 잠시 서울에 들른 일이 있었다. 그때 오자마자 서울의 새 성당 건축물을 돌아보면서 하루를 보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얼마나 궁금했으면, 오랜만에 고국에 오자마자 새로 지은 성당들을 순례했을까. 이제 생각해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시스티나 경당에 미술가들을 초청해 미사를 거행하고, 새로운 종교미술을 독려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장발 화백은 그보다도 십 년 전에 서울에서 ‘성미술전람회’를 열었고, 그 오년 전에 미술가들과 함께 혜화동성당 건축을 기획한 것이다. 참으로 높은 지혜와 시대를 앞서 내다보는 선견지명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천주교회에 박해가 사라지고 20세기를 여는 즈음 태어난 장발 화백은 일찌감치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한국 교회미술의 필요성을 예견하고 제시했다. 마지막까지 고국에서 삶을 살았다면 한국 미술계에서는 물론 교회미술 분야에서 얼마나 큰 역량을 보였을까. 한 개인이 공공의 가치 증진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니, 지난날 역사들이 더욱 아쉽기만 하다.
최종태(요셉·조각가) :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공주교육대와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1970년부터 30여 년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각전을 비롯해 소묘전, 파스텔화전, 목판화전, 유리화전 등 국내외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영기념사업회 회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최종태(요셉·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