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라는 말보다 공동체라는 말이 더 친밀감을 주는 것일까? 이젠 공동체란 말을 입에 달고 있다. 심지어 지방자치단체나 정치단체까지도 공동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게 가면같이 들린다. 속을 들여다보면 꼭 이용하려는 속셈인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 그리 너도 나도 공동체란 말을 쓰기 좋아할까? 그것보다 더 친밀감을 갖고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리라. 있다면 ‘너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사실 부부나 연인 사이에 흔히 쓰는 말이지만 아주 오래 전에 예수님께서 이 말을 쓰셨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라는 말씀이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1.26)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과 하나 되려는 진정성이 넘쳐난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다”라는 구절은 반복해서 읽어도 가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예수님 사랑의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이런 진실성과 일체감을 그 생명으로 한다. 사람들 하나하나를 챙기고 보듬어 주는 그런 개념 말이다. 단체 발전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이비 종교 단체라면 모를까, 진정 예수님 사랑의 가르침을 실현해 가려는 공동체라면 사람이 바로 형제가 되고 가족이 돼야 한다. 그런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이념 때문에 떠나듯 갈라질 이유가 없다. 이념보다 그리스도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이니 말이다.
좀 비슷한 예일지 모르지만, 어느 본당 관내에서 유치원을 운영하는 신자가 상담하러 왔다. 그는 정말 열심히 매일미사에 참례하고 본당 봉사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하필 본당에서 유치원을 설립한 것이다.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이 경쟁해야 할 일이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본당 주임 신부님이 강론 중 신자들에게 그 신자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자녀를 보내지 말라고 말한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본당에서야 납득하고말고 상관없겠지만, 본인은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 거기에도 경쟁이 있었던 것일까? 내가 그 상처와 오해를 풀어주려니, 내 맘 또한 속이 탈 지경이었다. 암튼 그는 마음의 평안을 안고 돌아갔다. 자신도 하느님도 잃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나 하느님 나라의 신비 같은 영적 체험을 원한다기보다 따듯한 보살핌이나 배려, 일체감 같은 것을 더 원하는 것 같다. 나도 때론 그런 보살핌이 그리웠다. 하기야 나조차 다른 사람을 잘 보듬지 못하고 있으니 따지자면 나도 위선자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암튼 공동체나 단체에 기대하기보다, 자기를 덜 내세우고 다른 사람을 더 챙기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지 않겠는가? 공동체에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자기가 꿈꾸는 공동체를 자기가 실현해 가는 것이 도리지 않겠는가? 거기 하느님 나라가 있으니 말이다. 그 길 선상에 우리 구원도 있는 것이다.
하재별 신부 (원로사목자·사랑과 평화 생활실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