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
■「봉인된 시간」 속에서 만나는 윤리, 예술 그리고 삶
1932년 4월 4일 러시아 북동부의 자브라체에서 유명한 시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86년 12월 29일 망명 중 아까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반의 어린시절(1962)’,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솔라리스(1972)’, ‘거울(1975)’, ‘안내인(스토커)(1979)’, ‘향수(1983)’, ‘희생(1986)’이라는 단 일곱 편의 작품만을 남겼지만 그 모두가 그의 예술가로서의 탁월함, 사상가로서의 투철함,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성을 잘 반영하며 각고의 노력과 절실함으로 인간의 영적인 차원을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영화만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도 자신의 예술적이고 영적인 투쟁과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하기 얼마 전 출간되었던 일종의 영화론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 「봉인된 시간」에서 그의 예술과 윤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김창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1)
그는 영화가 시학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이는 영화예술이 진실된 삶의 윤리를 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시란 문학의 한 장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란 내겐 하나의 세계관이며 현실과 맺는 관계의 하나의 특수한 형식이다. 이렇게 볼 때 시란 인간을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동반하는 하나의 철학이 될 것이다.
… 이런 예술가야말로 존재의 정서적 구조의 특별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직선적인 논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으며, 섬세한 모습의 특수한 본질과 삶의 비밀스런 현상, 삶의 복합성과 진실을 작품 속에 담아낼 수 있다.(26, 27쪽)”
한편, 그의 예술관을 보면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을 통해 완성된 이상주의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관점을 그저 하나의 사상으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하고 살아온 진실된 경험과 부합하기에 각고의 숙고와 결단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세계관과 윤리적 그리고 이념적 목표인 것이다. 훌륭한 걸작 예술품은 윤리적 이상을 표현하려는 노력 속에서 탄생한다. 윤리적 이상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느낌을 좌우한다. 예술가가 삶에 애정을 가진다면 그는 이 삶을 인식하고, 변화시키고, 삶을 개선시키는 일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 또한 감지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만일 한 예술가가 삶을 더욱 보람차게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면 현실이 묘사되는 과정에서 그 예술가의 주관적인 표상과 그의 영적인 상태를 통해 현실이 여과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인간 완성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정신적 노고의 결과인 것이며, 사물에 대한 느낌과 생각의 조화로, 그 품위로 그리고 그 단순간결성으로 우리들을 사로잡는 세계관의 표현인 것이다.(33쪽)”
그의 영화론은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사명에 대한 깊은 인식과 문제의식에서 자라난 ‘책임의 윤리’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소비사회의 상품처럼 자기 자신을 대해서는 안되며 삶과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 노력, 삶의 근본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는 예술은 ‘절대진리’의 인식을 위한 추구이자 실천이어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합니다.
“예술과 학문이란 그러니까 인간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형식인 것이며, 소위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인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인간적인 것, 잔인한 것, 무한한 것, 제한된 것, 이 모든 것들을 예술가는 독특한 방법으로 절대적인 것을 포착하는 한 형상의 창조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46쪽)”
그는 근대 이후 예술의 상업화와 자기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며 다음과 같이 우리 시대에 잊혀진 진정한 예술가의 전형을 떠올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현대 예술가의 오만불손함을 한 번쯤 샤르트르(Chartres) 대성당을 지은 이름 없는 건축가의 겸손함과 비교해야만 할 것이다! 예술가는 사심없는 임무 수행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을 우리 모두는 오래전에 이미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