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셨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5,20)고 하셨을까? 왜 행복의 길을 가르치시고(마태 5,3-11),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마태 6,33) 하셨을까?
신앙은 영적으로 성숙돼야 진정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은 의로움의 길이며, 의로움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한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마태 7,1) 하시고 예물을 제단에 바치기보다 형제와 먼저 화해하여라(마태5,24),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라고 하셨고, 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고 하시면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최후의 가르침으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마태 25,31-46)을 남기셨을까?
하느님을 믿고 섬기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모두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계명이다. 인간 행복과 인류의 평화, 축복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종종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하느님께 매달린다고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면 아마도 세상은 뒤죽박죽이 될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하느님께서는 이치(理致)를 가지고 세상을 운영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배워 알고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건성으로 듣고 넘긴다. 그것이 신앙의 이치인 줄 생각도 안한다. 성경을 세 번씩 필사한 사람이나, 성당이나 수녀회에서 하는 성경학교에 다녔다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아도 의로움은 커녕 이웃에 대한 정당성이나 배려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신앙생활의 가치와 실생활의 가치가 분리돼 있는 듯 보인다. 보고 듣고 판단하는 것 모두에서 오로지 자기 이해관계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런 이면에는 교회 성직자들의 가르침이 믿음과 신앙생활에만 초점을 맞추고 가르쳤거나, 잘 가르쳤는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고쳐가고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하느님의 복을 받는 데에만, 쉽게 말하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수께서는 몸만 와 있지 마음은 콩밭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한다면서 아주 심한 말씀을 남기셨다.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이하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2-43.46)
글쎄 죽은 다음에 겪을 일이라 하겠지만, 의로움과 사랑을 버리면 우리 마음의 질서뿐 아니라 삶의 질서, 관계가 다 흐트러지고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부당한 대우, 실망, 갈등, 혼란, 고통들이 그로 인한 결과이지 않은가?
이제 자기 행복과 세상의 질서를 위해 곱씹어 볼 말은 의로움과 사랑에 대해서다. 그게 신앙의 길이요, 영성의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