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2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중)
모순된 현실 속에서 영적 가치 찾는 ‘좋은 영화’
임인덕 신부 열정과 노력으로
타르코프스키 작품들 알려져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 직시
영화 ‘잠입자’의 한 장면.
■ 영화와 영성
우리나라에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타르코프스키가 망명시절에 타계하기 전 감독한 마지막 두 작품 ‘희생’과 ‘향수’가 1990년대 중반에 뒤늦게 개봉되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좋은 영화를 목말라하던 이들이 탁월하게 미적이면서도 영적이며 윤리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는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발견하고 많은 감동과 배움을 얻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설립한 ‘성 베네딕도 미디어’의 기여가 컸습니다. 성 베네딕도 미디어는 상업적 고려 대신에 사명감을 가지고, 당시 주된 영상물의 수용매체였던 비디오로 타르코프스키의 러시아 시절 대표작 ‘안드레이 루블료프’와 ‘잠입자(스토커)’를 출시하였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분도출판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과 문화 사목에 귀중한 기여를 한 임인덕 신부(독일명 : 세바스티안 로틀러, 2013년 선종)의 열정과 노력이었습니다. 임인덕 신부가 판권과 번역, 기술적, 경제적 문제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난해하다 할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한국에 소개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그의 영화가 지닌 영적, 도덕적, 예술적 가치를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임인덕 신부는 2005년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의 감사패 수상 소감에서 좋은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에 딱 들어맞는다 하겠습니다.
“묵상, 그리스도교 교육, 사목에 대한 비디오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들고 연대감, 자유, 인권, 평화의 가치관을 정립시켜 줄 극영화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제작하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종교적 체험을 목적으로 제가 선정하는 비디오 영화에는 대중성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작가주의 영화’이고 탁월한 예술성과 의미심장한 내용을 지닌 작품들입니다. 종교영화가 아니더라도 좋은 영화는 인간의 품위, 삶과 죽음, 구원, 올바른 가치관, 양심, 평화, 인권 등의 메시지와 영성을 충분히 발견하게 해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좋은 영화는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매력적입니다. 최상의 영화는 그저 암시만 줄 뿐 정곡을 찌르되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가주의 영화와 예술영화는 굳이 신앙이라든지 신을 주제로 삼지 않고도 종교적 체험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권은정,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 임인덕 신부이야기」, 분도출판사, 2012)
뛰어난 문화적 감식안과 복음적 열정으로 평생을 문화 복음화에 헌신했던 한 수도자가 가장 높이 평가한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성서의 인물들이나 성인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매우 인내롭게 해석해야 하는 상징이나 집요한 윤리적 고뇌, 숨김없는 종교적 회의와 신앙적 위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영화들이 진지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를 직시하고 대결하며 형상화하는 노력은 사실 우리의 영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부터 단련시키고 정화시키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영성의 문으로서의 정신적 위기
사실 100년이 넘은 영화 역사에서 불과 몇 안되는 ‘영화 작가’들만이 진정한 영적이며 초월적인 영화미학의 모범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상적이고 수사학적인 방식으로 종교적인 이야기나 상징을 자신의 영화에 사용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대신, 매우 실존적이며 예술적인 방식으로 정신적 위기에 직면한 인간이 겪는 내면의 풍경을 그려내고 그러한 고뇌하는 인간상이 초월의 세계를 표징과 침묵을 통해 만나는 접점의 순간을 형상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적으로 포착된 순간은 보는 이에게 흘러가는 시간과 질적으로 다른 ‘때’, 곧 성서적 의미의 ‘카이로스’를 지각하는 드문 경험을 하게 합니다. ‘때’를 아는 것은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실현된 종말론’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윤리적 결단을 매개로 하여 계시와 초월의 세계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대면하고 답하도록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목표에 매우 가깝게 다가갔다고 보이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덴마크의 영화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1889~1968), 프랑스의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1901~1999),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1918~2007)입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이름 역시 이 특별한 계보에 놓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여러 차례 얼마나 베리만과 브레송의 영화들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는지를 밝히면서도, 자신이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신적 위기가 지닌 종교적, 영적차원의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통찰했던 러시아의 대작가 도스토옙스키가 확립한 ‘전통’에 속해 있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는 ‘정신적 위기’를 외면하는 대신 오히려 이와 대결하고, 거기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용기를 지닌 예술만이 인간의 깊은 영적 차원을 드러내고, 정신적 위기에서 회복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내게 특별히 아주 의미깊었던 것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러시아 문화 전통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이 전통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그렇게 찬란하게 꽃피워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이 전통은 오히려 경시당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전통이 원칙적으로 유물론과 통합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높은 평가가 주춤하고 있는 또 다른 원인은 이 작가가 쓴 작품의 주인공들, 아니 이 작가의 모든 작품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계자에게도 해당되는 특징인, ‘정신적 위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러시아에서 왜 사람들은 이 ‘정신적 위기’라는 상태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인가?
‘정신적 위기’란 내게는 항상 건강하다는 표시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견해로는 ‘정신적 위기’란 자아를 발견하고 하나의 새로운 믿음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 위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삶이란 부조화에 가득 차 있는 반면 인간의 영혼은 궁극적으로 조화를 갈망한다. 이러한 모순 속에 인간이 꿈틀거리게 되는 자극을 받게 되고, 또한 동시에 인간의 고통과 희망의 원천이 있는 것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적 심오함과 영적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분도출판사, 244~245쪽)”
이제 ‘정신적 위기’를 영성의 문으로 삼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인 ‘잠입자(스토커)’와 ‘희생’을 살펴보려 합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