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여름 무렵 일에 파묻혀 있다. 출판사와 시청각실 일을 한꺼번에 맡아 보면서 열정적으로 일하던 때의 모습.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분도출판사 3대 사장 임인덕 신부. 그는 출판이 진정 문화가 되려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보여 준 출판인이다. 1971년부터 22년간 400여 권의 양서를 출간하였다. 주된 책무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최신 연구 업적 소개였으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넓은 출판 영역을 개척했다. 아무도 그를 사상가로 보지 않지만, 출판에 관한 한 그는 실천하는 사상가였다. 범접할 수 없는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는 뜻이다. 그와 나눈 숱한 대화 내용을 알뜰히 저장해 둔 ‘기억 창고’에서 7가지 주제를 불러내어 그가 책으로 쌓은 중후한 ‘서탑’을 조심스럽게 요리조리 조명해 본다. 일종의 진지하고 귀한 탑돌이 일진데, 그를 기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쓴다.
■ 대지평을 구축하다
“하이니(애칭), 좋은 책은 무엇입니까?”
“좋은 책이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모든 책입니다.”
그는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면 어떤 영역의 책이라도 낼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영화든 철학과 신학이든 상관없이 책을 냈다. 그의 출판 사상의 근간이다. 출판이 교육과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믿었던 그는 도무지 교조적이지 않았다. 저자나 역자 선정도 초종파적이었다. 거장의 출판 지평이 고작 짬뽕 아냐? 아님 비빕밥! 때로 둘 다 맛이 좋다. 「분도우화」, 「봉인된 시간」, 「민중의 길」, 「미세레레」, 「종교 박람회」, 「상처입은 치유자」 등을 꼽고 싶다.
■ 발품을 팔다
“하이니, 책 선정은 어떻게 합니까?”
“가능한 모든 정보를 접해야 합니다.”
결국 품을 파는 일이었다. 발품이다. 그는 매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를 누비며 신작 도서 목록을 닥치는 대로 가방에 주워 담았다. 꼼꼼히 죄다 읽었다고 했다. 그는 속독 수준의 독서광이다. 판단이 빨랐던 30대 중반의 젊은 출판인은 시대적 흐름의 맥을 짚을 줄 알았다. 도서전시회는 신작 도서의 현물 전시가 꽃인데, 중심 자리에 전시된 책뿐 아니라 책장 맨 밑에서도 보물을 찾아냈다. 「꽃들에게 희망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등을 이렇게 찾았다고 했다. 사상가 운운하더니 고작 발품? 느린 시대의 우직한 행각이었다.
■ 주춧돌을 놓다
“하이니, 교회 토착화는 무엇입니까?”
“원문에 충실한 번역 성경과 다양한 성경 해설서와 성경 시대를 잇는 교부 문헌과 분야별 신학개론서와 열린 시각의 교리서가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 후에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춧돌을 먼저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각종 논문에서 그가 낸 책의 인용 빈도가 이를 증명한다. 기조는 독일의 헤르더와 콜함머, 프랑스 도미니코회 세르, 미국의 오르비스 출판사와 많이 비슷하다. 「200주년 신약성서」, 「교부문헌총서」, 「신학총서」, 「아시아신학총서」, 「종교학총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예수의 비유」, 「가톨릭 신앙 입문-화란 교리서」, 「하나인 믿음」 등을 들고 싶다. 초석은 대개 무겁다. 병간호하며 들어봤는데 그의 몸무게가 장난 아니던데, 그가 놓은 초석들은 더 묵직하다.
첫 미사 후 축하연에 함께한 정양모 신부. 당시 정 신부는 뷔르츠부르크대학의 슈낙켄부르크 교수 밑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명민한 신학도였다. 훗날 한국에서 평생 동안 이어진 정 신부와 임인덕 신부의 우정은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 시대 징표를 읽다
“하이니! 우리 책이 너무 빠르다고들 합니다?”
“아닙니다. 그때가 바로 때입니다.”
징표 읽기는 그에 대한 오해가 많은 주제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동향 파악의 선점이다.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자임하는 일이다. 시의성을 충족시키면, 영향사적 결과가 좋다는 뜻이다. 또 다른 뜻의 징표 읽기는 시대 참여다. 그의 시대는 7, 80년대인데, ‘지금-여기’가 그에게 소중했다. 정보기관 사람과 임신부의 대화다. “신부님, 책이 어둡습니다.” “안 그래도 인쇄소에 말해 좀 밝게 찍으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유머러스? 능구렁이! 그가 낸 첫 책인 「성난 70년대」, 「해방신학」, 「제3의 인생」, 「어떤 정치적 인간의 초상」을 소개한다.
■ 기조를 일관하다
“하이니, 버스터미널에 물건 찾아오는 일까지 하십니까?”
“누구든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됩니다.”
이 주제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쇠를 만드는 세 과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를 일관제철소라고 부른다. 그는 이를테면 ‘일관출판사’를 구축하였다. 그는 기획, 번역, 편집, 디자인, 인쇄, 홍보, 판매 등 모든 과정을 챙겼다. 또 다른 의미는? 그의 출판 방향이 한결같았다는 점이다. 결코 즉흥적이지 않았다. 「분도소책」 시리즈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 완벽을 추구하다
“하이니, 책 만드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립니까?”
“그건 편집부에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들의 대답. “그렇게 하면 우리가 욕먹습니다.” 빨리 끝내라는 독촉에 대한 편집부의 입장은 항상 ‘끝나야 끝난다’였다. 그는 편집부의 뜻을 존중했다. 일종의 방조다. “책은 분도가 잘 만들지.” 안팎의 평판이었다. 당시 두루 분도에서 책을 내고 싶어 했다.
■ 결국 사람이었다
“하이니, 인복이 많습니다?”
“진실하게 다가가면 됩니다.”
그는 프랑스 갈리마르사(Librairie Gallimard)에는 수 겹의 조건그룹이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람을 귀히 여겼다. 꼽는다면, 역저자 권정생, 김영무, 장익, 정양모, 최민식과 편집자 김윤주, 정한교가 그의 친구들이다. 그는 사람들이 무시해도 이용해도 배반해도 그들을 아낀다. 끝까지 지켜준다. 아는지 모르는지 내색이 통 없다. 멍청이 아냐? 글쎄? 고술 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신비로웠다.
그는 책 속에 혼을 담은 출판인이다. 아직도 유통되고 있는 그가 낸 책을 보라. 그가 책으로 쌓은 거탑은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결코 순진하지 않은 영민한 출판인이었다.
선지훈 신부(왜관본당 주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속 수도사제이다. 대구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에서 신학 석사를 취득했다. 1997년 사제품을 받았고 분도출판사 책임자로 활동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