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2002년부터 14년간 인천교구를 이끌어 온 최기산 주교가 5월 30일 오전 11시40분 인천 심곡동 국제성모병원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건강한 모습이었던 최 주교의 갑작스런 선종은 인천교구 교구민들은 물론 한국교회 전체와 지역사회에도 적지 않은 충격과 아픔으로 다가온다.
최 주교는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인 미국 출신 나길모 주교(재임 1961~2002년)에 이은 두 번째이면서 첫 한국인 교구장이다. 최 주교의 인천교구장 착좌는 인천교구사에서 하나의 획기적 사건이었다. 나 주교는 교구장직에서 물러나며 40년간의 교구장 재임기간 중 가장 기뻤던 일로 한국인 사제인 최 주교가 자신의 뒤를 이어 교구장직을 승계한 것을 꼽았다.
최 주교가 2002년 4월 교구장으로 착좌할 당시 인천교구 교세는 본당 85개에 사제 150여 명, 신자 36만여 명이었지만 14년이 흐른 현재 본당 122개, 사제 310여 명, 신자 49만여 명으로 성장했다. 사제 수는 무려 배 이상 증가했고 본당 수도 50% 가까운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2002년 4월 25일 인천교구장 착좌미사 후 최기산 주교가 전임 교구장 나길모 주교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최 주교는 교구장 부임 뒤 긴 호흡으로 2011년 인천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했다. 2011년 6월 가톨릭신문과 가진 교구 설정 50주년 특별 인터뷰에서 “인천교구는 50주년 희년을 맞아 내외적 복음화를 위한 노력들을 단발성으로 끝내지 않고 삶 안에서 신앙의 생활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세상 안에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라는 말로 사회정의 실현을 향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최 주교가 신앙의 내실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교구 내 성지 발굴과 성역화였다. 인천교구 내 대표적 순교터지만 이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물진두에 2014년 5월 순교기념경당을 지어 봉헌했다. 한국교회 첫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 성현 묘역 성역화 사업은 인천광역시와 유기적 협조 아래 궤도에 오르고 있다. 최 주교는 제물진두 순교기념경당 축복식 강론에서 “신앙의 증거자들이 목숨을 바친 제물진두에 세워진 순교기념경당은 규모는 작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장대하다”면서 ‘펄펄 끓는 신앙’을 강조했다. 최 주교가 제물진두 순교기념경당 봉헌을 계기로 순교 선열들의 신앙을 신자들에게 주지시키자 제물진두 순교기념경당은 인천교구는 물론 이웃교구 신자들의 정기적인 순례코스로 빠르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교구 설정 50주년 인터뷰에서 밝혔듯 최 주교는 사회복음화 차원에서 ‘사회정의’ 실현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인물로 기억된다. 2002년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교구 차원에서 ‘노동자주일’을 제정해 매년 5월 전후 노동자주일 미사 봉헌과 비정규직 철폐 등 노동인식 개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한 교구 노동자센터를 운영하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고충 상담과 체불임금 구제 등 다양한 공익 사업도 그의 관심 속에 이뤄진 일이다.
최기산 주교가 2009년 12월 18일 용산 참사현장을 방문해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2004~2010년 6년간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내는데도 선봉에 섰다. 2008년 1월에는 서해안 기름 유출 피해지역인 충남 태안군 소원면을 찾아 직접 피해복구 활동에 참여하고 봉사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2009년 12월에는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용산 참사 현장을 찾아 “정부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 늦어도 올해가 가기 전에 용산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며 ‘국민이 흘린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부의 할 일입니다-용산참사의 빠른 해결을 촉구하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한 일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교회의 존재를 새롭게 각인시켰다.
우리 사회 소외된 이웃인 북한이탈주민(새터민)들을 향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학업을 이어가기 힘든 낯선 환경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민하는 새터민 청년들에게 남모르게 학비를 지원해왔고 새터민 청소년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매년 ‘보나 장학금’ 2000만 원을 지급하기도 했다.
최기산 주교가 지난 5월 11일 강화꽃동네 노인요양원 성녀 헬레나성당 봉헌식에서 성당 벽에 성유를 발라 축성하고 있다.
최 주교는 통일 후 인천교구가 담당할 북한지역(황해도) 선교에 대한 희망도 간직했다. 매월 1회 답동주교좌성당에서 통일기원미사를 주례했고 지난 5월 11일에는 북한과 지척인 강화꽃동네 노인요양원 부지에 세워진 ‘성녀 헬레나 성당’ 봉헌식에서 “성녀 헬레나 성당 종탑에 달린 종소리가 북에도 울려퍼지길 기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북녘 형제들을 향한 애타는 사랑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던 셈이다.
■ 故 최기산 주교 약력
▲1948년 5월 16일 경기도 김포 출생
▲1967년 2월 성신고등학교 졸업
▲1974년 2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1975년 12월 6일 사제 서품
▲1975년 12월 20일~1977년 1월 14일 부평1동본당 보좌
▲1976년 3월 1일~1977년 2월 28일 인천박문여자중학교 교사
▲1977년 1월 15일~1977년 8월 10일 백령본당 보좌
▲1977년 8월 11일~1981년 2월 24일 김포본당 주임
▲1981년 2월 25일~1983년 5월 31일 해안본당 주임
▲1981년 2월 25일~1986년 6월 7일 인천교구 성령쇄신운동 지도신부
▲1983년 6월 1일~1987년 2월 17일 심곡본동본당 주임
▲1987년 2월 18일~1990년 2월 13일 교구 사목국장
▲1990년 2월 14일~1994년 3월 31일 해외교포사목
▲1994년 2월 14일~1995년 6월 7일 미국 유학
▲1994년 5월 미국 성요셉대학교 석사학위 취득(종교학)
▲1995년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 영성신앙연구소 수료
▲1995년 6월 8일~1996년 2월 4일 산곡3동본당 주임
▲1996년 2월 5일~1999년 11월 9일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영성처장, 겨레문화연구소장)
▲1999년 10월 29일 인천교구 부교구장 주교 피명
▲1999년 12월 27일 인천교구 부교구장 주교 서품
▲2000년 1월 17일~2001년 1월 15일 교구 관리국장 겸 사무처장 겸 총대리 겸 부교구장
▲2001년 1월 16일~2002년 4월 24일 인천교구 총대리 겸 부교구장
▲2002년 4월 25일 인천교구 제2대 교구장 착좌
▲2002년 4월 25일~2010년 3월 10일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
▲2002년 9월~2007년 11월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위원
▲2004년 10월 14일~2010년 3월 10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2004년 10월 14일~2016년 3월 15일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
▲2008년 제49차 세계성체대회 한국 대표 주교
▲2010년 3월 10일~2016년 3월 15일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위원장
▲2010년 3월 10일~2016년 5월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
▲2011년 10월 12일~2014년 10월 30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감사
▲2014년 10월 30일~2016년 5월 주교회의 서기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