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2월 계산본당서 첫영성체.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 제공
■ 전자공학과 졸업 후 곧바로 신학교로
‘장신호’(張信浩). 믿음을 널리 베풀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신학교에 가길 원했던 아버지는 어릴 적 앓은 중이염으로 아픈 귀 때문에 사제의 꿈을 포기했다. 결혼을 하며 자식을 낳으면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966년, 첫 아들 장신호 주교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늘 기도했다. 3남1녀 중 맏이로 든든한 아들이었고, 부모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었다.
아들은 영남대학교 의대에 1지망으로 지원했다가 떨어져 2지망으로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1988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그때 아버지는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가 됐구나”라며 기뻐했다.
중고등부 주일학교 친구였던 이유정(데레사·무학고 교사)씨는 “학창시절 ‘신돈’(신호 돈보스코를 줄여 부른 애칭)이 늘 섬세하게 사람들을 잘 챙기고 신앙심도 깊어 신학교에 갈 것이라 다들 생각했다”고 기억했다.
결국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던 계기는 뭘까. 장 주교는 계산본당 주일학교 교리교사회 활동을 하며 성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교리교사 시작했을 때가 1984년이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한국을 찾으셨는데, 5월 5일 대구에 오셨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과 시민운동장에서 거행된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는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리 더 열심히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더 깊게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본당 교리교사회 선배들이 사제, 수도자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성소는 더 굳어졌다. 교사회 출신 선배로 박영봉 신부(대구 산격본당 주임), 이경기(구미 도량본당 주임) 신부 등이 있다.
1986년 2월 23일 본당 교리교사 피정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신호 주교.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 제공
1998년 8월 25일 사제서품식 후 가족들과 함께.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 제공
■ 신학생 때 유학하며 향수병 앓아
장 주교에게 신앙을 심어준 이는 아버지 장진휘(베드로·77)씨다. 새벽미사를 봉헌하며,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아들은 자랐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해, 또 성직·수도자를 위해 기도했다. “아버지께서 본당 위령회 활동을 하며 장례 때마다 장지를 찾아 기도하셨어요. 그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버지의 기도와 어머니의 사랑은 장 주교가 사제로서 길을 걷는 데 큰 힘이 됐다.
어머니 김현순(안나·75)씨는 맏아들이 신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처음엔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들이 평범하게 살길 바랐지만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데 반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모님께 아들을 맡기며 기도했다. 동생 장지호(도미니코·47)씨는 “공학도로 전공을 살릴 것이라 생각했고, 집안을 이끌 맏이로서 부모님의 기대가 컸다”고 말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1993년 신학생 신분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 한국에서 유학을 잘 보내지 않던 국제신학원이라 한국인 유학생이 2명뿐이었다. 아버지와 매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2년에 한 번씩 유럽에서 공부하던 교구 선배 사제, 신학생들과 만나 외로움을 달랬다. 지금도 그때 이문희 대주교가 끓여준 라면과 한국서 가져왔던 김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향수병을 앓기도 했다. 대구 집의 모습을 하나하나 연필로 스케치해 보낸 것을 보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1996년 8월 교황청립 ‘사도들의 모후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2년 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석사학위, 200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주교좌 본당 복사단으로 활동한 시간들은 전례학을 전공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
1997년 12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부제 복사 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인사나누고 있는 장 주교.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 제공
1993년 12월, 프랑스 루르드에 모인 교구 재유럽 신학생들. 대구대교구 임종욱 신부 제공
■ ‘외유내강’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성품
장 주교에 대해 모두들 ‘부드럽고, 배려 깊고, 겸손하다’고 말한다. 주교 임명 발표 후, 어디서든 첫 인사로 “부족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신학대학 입학 동기 이성호 신부(교구 성소담당)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포용력을 지녔다”면서 “서울 주교회의에 있으면서도 동기 모임에 꼭 왔다. 어떨 때는 2시간 얼굴 보고 식사만 하고 가더라도 친구들과 함께 하려고 마음을 썼다”고 말했다.
신학교와 로마에서 함께 공부한 곽종식 신부(대구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는 “박사논문 준비로 바쁠 때인데도, 부모님 로마 안내를 부탁했을 때 직접 차를 운전하며 며칠 간 함께 여행했다. 늘 웃고, 정이 많은 성품”이라고 말했다. 또 “물건에 집착하지 않아 자유로웠고, 화려하거나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다른 이들을 배려했지만, 일에 있어서는 정확하고 완벽했다.
가톨릭전례학회에서 함께 활동한 윤종식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는 “부드러우면서도 주장은 굽히지 않는다. 무엇인가 생각한 일은 끝까지 해낸다”면서 “학자로서 꾸준히 연구하는 자세가 늘 부러웠는데, 방에 들어가면 연구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유학시절을 회상했다.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강대인 위원은 “예식서 하나를 번역하기 위해 관련 예식서와 전례서를 모두 꺼내놓고 정리하며 몰두했다”면서 “가끔씩 ‘이과 출신’이어서 그렇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치밀했다”고 말했다.
2002년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부임했을 때, 영성 지도를 받은 임종욱 신부(성주 무학연수원장)는 “신학생들 의견을 잘 들어주셨고, 특히 수업 중 말씀하셨던 신자들을 배려하는 전례, 사목적 배려를 위한 전례에 대한 가르침에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2003년 1월, 신학생들과 피정에 함께 한 장 주교(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 제공
박경희 기자 july@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