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2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하)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삶의 피폐함 극복’ 확신
"참된 예술이란 자유로운, 책임 있는 결단의 삶 선택하도록 자극과 영감을 주는 것"
영화 ‘희생’의 한 장면.
■ 양심의 시험과 단련을 통한 영성의 길
1978년에 제작된 영화 ‘잠입자’(‘안내자’로도 번역되며 원제는 ‘스토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러시아에서 찍었던 마지막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타르코프스키의 메시지와 영화 미학이 당시 공산주의 정권이 요구한 공식적 지침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이 영화 이후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공격은 그로 하여금 결국 서방으로의 고뇌 어린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그가 망명 후 실감하게 되는 서구 자본주의 세계에 만연한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미리 예감하게 합니다. 그가 이전에 만든 영화 ‘솔라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SF 소설을 이야기의 기본 구조로 삼으면서도 장르의 문법을 따라가는 대신, 인간 정신의 위기와 양심의 시험에 대한 지극히 진지한 성찰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탁월한 연출과 시적 영상을 통해 제시되는 묵시록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 ‘잠입자’는 그를 찾아온 작가, 과학자와 함께 숨은 소망이 실현된다는 ‘금지 구역’ 또는 ‘비밀 구역’을 목숨 걸고 찾아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금지 구역’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죄’와 일체의 보호막 없이 대면하게 되고 가장 깊은 양심의 부름에 직면합니다. 이는 전율할 정신적 위기이지만, 감독은 이야말로 유일하게 현대인들이 정신적 재생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는 듯 보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저서 「봉인된 시간」에서 “자신이 이 작품에서 다름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란 무엇인가를 시적언어로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며 영화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도중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에 대해 많이 숙고한 연후에 그들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감행한 여행의 목적지인 그 방의 문턱을 실제로 넘을 것인가를 더 이상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내적, 도덕적 상태가 결국 비극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정신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정신력은 다만 시선을 자기 자신의 내부로 던지는 데까지밖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본 자신들의 모습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탁월한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여전히 절망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고, 신념의 회의를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상실한 이들에 대한 봉사라는 자신의 소명을 거듭 발견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로써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서 현대인들이 빠져 있는 윤리적 무력함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무력함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길을 간절하게 모색합니다. 그는 그 길이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역은 인간이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이며, 인간은 그 과정에서 파멸하든지 아니면 견뎌내든지 할 뿐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이 과정을 견뎌내는가 마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인간이 스스로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으며, 부차적인 것들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그 인간의 능력에 좌우된다.”
그러기에 타르코프스키에게 참된 예술이란 이러한 정신적 위기를 정직하게 그려내고 그로부터 각 개인이 양심의 부름에 대해 고뇌하고 응답하여 이기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책임 있는 결단의 삶을 선택하도록 자극과 영감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로서는 인간의 유일하게 진실로 중요한 과제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복구시키는 일이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다시 찾아야만 하고, 그 영혼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양심과 조화시키는 시도를 해야만 한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고통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스스로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자극시킨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책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세상은 어차피 남들의 타락한 의지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은 세상 돌아가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태만과 게으름을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세계의 조화를 재생시키는 일은 개인적인 책임감을 복구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 인간의 윤리적 무력함 형상화 시도
우리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저술에서 만나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사실 여러 면에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철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잠입자’에서 인간의 선의지와 도덕률의 초월성이라는 칸트적 윤리학의 차원과는 다르게 영성적 관점에서 인간의 윤리적 무력함의 근원을 형상화하려 시도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를 우리는 「봉인된 시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진술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특별히 인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관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숙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안에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을 언제나 무시하여 왔다. 인간은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기만적인 우상을 쫓아간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인간 삶의 밑바닥을 이루는 예의 매우 평범한 기본적 부분,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같은 사랑과 몰아적 헌신이야말로 현대의 불신과 냉소주의 그리고 공허함에 대치될 수 있는 마지막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작품 ‘잠입자’에서 인간의 사랑이야말로 절망적인 인간 세계에 관한 모든 삭막한 이론화에 대하여 성공적인 반기를 들 수 있는 예의 기적이라는 것을 나는 명백하고도 수미일관되게 말한 바 있다. 다만 우리들은 사랑 역시 잊은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망명한 후,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면서 스웨덴에서 그의 유작이 된 그 유명한 작품 ‘희생’을 기어이 완성합니다. 그의 죽음이 확실시되자 비로소 당시 소비에트 정권 허락 하에 출국허가를 얻어 타르코프스키 부부의 품으로 올 수 있었던 어린 아들에게 바쳐진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가 인류에게 남긴 믿음과 희망에 대한 감동적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인류의 정신적인 위기, 삶의 피폐함이 극복될 수 있다고 확신한 그의 예술은 참된 영성의 길을 찾는 신앙인에게도 많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