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리합창단’ 공연 모습.
1998년 6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어요. 1994년 12월 27일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12명의 자매님으로 구성된 한소리중창단과 함께 ‘국악묵주기도’ 녹음 작업을 했었습니다. 이분들은 근 1년 반 동안 배움터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열심히 참여했던 분들이었지요. 특히 녹음작업을 하면서 매일 보다시피 하니까 서로 많이 끈끈해지고 국악성가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 제가 유학을 떠난다고 하자, 참 많이들 아쉬워하셨어요. 그때 제가 그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저도 참 아쉽습니다. 여러분을 통해 이제 막 국악성가가 태동되고 있는데 이렇게 떠나게 되어서요. 그러나 제가 지금 떠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매님들, 우리 함께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보도록 하십시다. 만일 국악성가가 하느님의 뜻이라면 제가 돌아올 때까지 여러분이 지금처럼 똘똘 뭉쳐 남아계실 것이고, 만일 하느님 뜻이 아니라면 뿔뿔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함께 기도하며 기다려봅시다.”
그랬는데 웬걸요, 제가 없는 사이에 오히려 이분들을 중심으로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 한소리중창단에서 1996년 10월 30일에 ‘한소리합창단’으로 확대 창단됐고, 이듬해 10월 광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소년소녀 가장 돕기 자선음악회를 성대하게 개최하는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이 초창기에 광주대교구 조영대 신부님이 지도를 맡아 많은 도움을 주셨고, 초대 단장 겸 지휘자로 김달 엘리사벳 자매님이 전적으로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일을 보면서 “아! 국악성가는 정말 하느님이 원하시는 거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수도회의 배려로 광주 수도원장으로 배치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한소리합창단 활동을 시작하게 됐지요. 물론 여전히 제 주된 임무는 수도원장, 피정지도, 학생지도, 동반자 지도 등과 같은 수도회의 일이었습니다만 월요일은 어김없이 한소리합창단과 함께했습니다. 참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합창단에서는 그해에 당장 귀국연주회를 하자고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당장 연주회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한 3년은 죽으라 연습을 해야 무대에 설 수 있습니다”라고 임원들과 단원들을 설득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지요. 드디어 2001년 결과물을 낼 수 있었습니다.
3월 25일 ‘국악미사곡 하나, 둘’이라는 제목으로 악보집을 발간했고, 8월에는 같은 이름의 음반을 냈습니다. 그리고 11월 11일 광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한소리합창단 창단연주회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단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티켓이 너무 많이 팔려서 비라도 와서 사람들이 덜 오게 해주시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비는 안 왔고 사람들은 넘치게 와서 결국 자리가 모자랐지요. 양해 말씀을 구하고 계단에 앉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청중으로 가득 찬 음악회였습니다. 한 곡 한 곡 부를 때마다 청중들의 반응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하느님 은총의 열기가 공연장 안을 가득 메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속으로는 연신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단원들도 여기저기서 울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하나 돼 한소리로 주님을 찬미하며 하늘나라를 맛보는 실로 행복한 연주회였습니다.
강수근 신부(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 한국관구장)
1992년 사제로 서품됐다. 미국 메리우드대학 음악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로마 교황청립 성음악대학 작곡과를 수료했다. 현재 국악성가연구소 소장과 우리소리합창단(서울) 담당 사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