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조각가 김세중 (1)
자신의 이익은 관심 밖, 오로지 예술 부흥에…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에 한몫
외국 명문 미술대와 교류 주선 등
한국 미술 위상 높이는데 큰 공헌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청동의 녹 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 그 더운 가슴으로/ 영원의 사랑 안에 쉬다”
1986년 조각가 김세중(프란치스코) 선생이 선종한 이듬해, 서울대 미술대 조소과 동문회와 서울조각회 등 후학들이 세운 추모비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추모의 글귀가 담겼다. 글귀는 문학평론가 이어령씨가 썼다.
그의 유덕을 기리는 후학들은 이어서 추모비에 김세중 선생은 1928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해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그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라고 새겼다. 서울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1회로 졸업한 후 평생을 서울대 미대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고, 3대에 걸친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과 한국미술협회이사장, 서울조각회장, 가톨릭미술가협회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의 직책을 맡아 미술계 발전에 헌신했다고, 또한 대한민국 문화예술상과 대한민국문화훈장(추서) 등을 받았다고 써내려갔다.
창작생활 40년간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이기는 절대 좇지 않았던 스승, 한국과 한국교회 조각계에 거목으로 뿌리 내렸던 그의 삶을 후학들이 회고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공사 현장에서 김세중 조각가(맨 오른쪽).
신이 흙을 빚어 남자를 만들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조각을 했다는 의미이다. 신과 조각가가 만난 상황을 꾸민 이야기가 있다.
신이 인간을 만든 후 인간의 삶이 궁금하여 모든 이를 불러 모아 물었다.
“자네는 무엇을 하나?”
농부, 어부, 상인, 법관 등등의 직업이 답으로 돌아왔다. 한참 후 “네, 저는 조각가입니다” 하고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뭐, 조각가라니 그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네, 조각은 입체로 창조하는 직업입니다.” “아니, 나는 너희에게 창조하는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그럼 너희가 나와 똑같이 창조를 한단 말이냐?” 하고 신이 놀랐다고 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 혜화동 로터리에 둥글게 휘어진 담이 재미있어 막대기를 그으며 걷는데, 순간 길옆에 있던 엄청난 조각이 시야를 가두었다. 그 조각은 바로 지금도 존재하는 혜화동성당의 전면 부조 ‘최후의 심판도’(1960)이다. 이것이 필자가 본 최초의 조각이다. 이렇게 우연히 김세중 선생님과 인연을 갖게 됐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 필자에게 ‘조각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인지하게 해주었고, 그 후 비누 조각이나 목판 조각, 석고 조각을 할 때면 혜화동성당의 부조는 내 조각적 창조의 근원이 됐다.
한번은 선생님의 수업 중 어떤 여학생이 투정을 부리듯 작업을 안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반항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우유와 빵을 가져와 여학생에게 건네시면서 “자네 이거 먹고 힘내서 작업하게”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우리 모두는 선생님의 아버지 같은 자상함에 감격했다. 선생님은 학생들 작품에 일일이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지나간 뒤면 우리들의 조각은 이루어졌다. 그분의 카리스마는 바로 조각 교육 방법론이었다. 즉 선생님은 표정으로 가르치셨던 것이다. 또 선생님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주어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해, 많은 학생이 선생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많은 헌신을 하셨는데, 그중 외국의 명문 미술대학과의 교류를 빼놓을 수 없다. 또 선생님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지을 재원이 없는 정부를 설득해 미술관을 짓는데 힘을 실으셨다. 당시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우리는 세계적 규모의 국립현대미술관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선생님은 과천 공사 현장을 수시로 찾아 사비로 공사장 인부들에게 식사를 사며 격려해주셨다.
자신의 이익은 전혀 좇지 않는 삶을 사신 분이시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혼란과 격변기를 거치면서 더욱 척박해진 한국 문화와 미술을 위해 헌신하고, 외로운 길을 가신 분이다.
선생님은 세계 부조사에 새겨질 작품을 혜화동성당에 남기셨다. 또 광화문에 세운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은 우리나라의 상징적 이미지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로 각인됐다. 조각이 한 국가의 대표 브랜드가 된 예는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등 몇 안 되는데, 우리에게는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다.
김세중 선생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개인 주문의 초상 조각은 만들지 않으셨고, 문화 예술 부흥이라는 화두를 지키셨다. 김세중 선생님의 작품이 미술사적 차원의 평가와 함께 미학적, 사회학적 차원의 평가가 함께 이뤄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릴케가 쓴 ‘로댕 어록’을 읽고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김세중 선생님은 신의 부름을 받은 조각가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로댕의 글귀를 들려주신다.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바위에 파고드는 물처럼 느리고 조용한 힘을 가져야 한다.”
신현중 교수(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울대 미술대 조소과와 미국 뉴욕 프렛 대학원을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