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시골에 사시는 노부부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퀴즈와 장기자랑 대결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천생연분’이라는 낱말을 맞추도록 할머니께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그러자 할머니께서 “웬수”라고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아니, 네 글자로….”하고 힌트를 주자 할머니가 금방 “정답”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대답했지요? “평생 원수!!!”
이 할머니의 대답이 꼭 글자 그대로의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주변에 있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더 힘들게 하지요.
용서라는 문제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힘겹게 다가오지만 사제인 저에게도 버거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한 본당에서 주임 신부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신자분들이 제게 와서 그 문제로 면담을 하시더라고요. 참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정리를 하지 못했는데, 그런 상태에 있는 저에게 제가 가진 비슷한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조언을 들으려고도 하고, 기도도 청하셨습니다. 신자분들에게 참 죄송하기도 하고, 또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신자분들의 어려움을 들으면서 저의 문제를 더 깊이 보게 되었고, 또 신자분들이 위로를 받고 힘을 내는 것을 보면서 저 자신도 힘을 내서 몸을 추스르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바라보라고 하느님께서 신자분들을 통해서 저에게 요구하시는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 생활을 하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뭔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거지요.
제가 어렵게 사제생활을 한 것을 알고 누군가가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는 지극히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분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싫더라고요. 저를 편들어 주면서 이야기 해주더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그분을 용서한 적은 없는데, 어느 순간에 그분이 제 삶에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기억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그분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상대방의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나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잘 안 된다는 거지요. 왜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