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전거 탄 소년’ 한 장면.
■ 사회적 영성 - 시대의 표징
세월호 참사, 생활고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 세 모녀, 과잉진압에 의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여전히 사경을 헤매는 가톨릭 농민회 원로였던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 이번 달 초 구의역에서 있었던 19세 청년 지하철 스크린 도어 수리공의 죽음 등등….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아프게 했던 많은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분노하거나 아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기도 했고, 또 그러다가는 다시 떠올리게 되는 이런 사건들을 되새겨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이러한 사건들이 사실 우연이나 예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 얼마나 위험스럽고 뿌리 깊게 절망과 폭력과 양극화의 악순환이 자리 잡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어쩔 수 없는 재난이 아니라, 개인의 이기적인 탐욕과 무책임, 이웃과 약자에 대한 무관심, 기관과 책임자들의 무능함과 비겁함에서 온 인재들이자 사회적 폭력이었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책임을 응시하고 느끼는 것은 이 시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아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그 이후 여러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대적 징표를 알아보고 응답하는 신앙인의 길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황이 시복미사에서 세월호 배지를 가슴에 달고, 희생자 가족들을 어루만져 주시자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들이 정치적 상징성을 지닐 수 있다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분명하게, “고통 앞에서 중립이란 없습니다”라고 응답한 말씀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교황은 이미 교황직에 오르자마자 첫 방문을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수용돼 있는 이탈리아 람페두사를 선택하였고, 절망적인 처지에 있는 난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더욱이 이러한 탈출 과정에서 조난당하고 수장된 수많은 이들의 비극을 기억하면서 전 세계인들에게 ‘무관심의 세계화’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촉구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연대’ 속에서만이 이러한 비인간화의 질곡에서 인류가 회심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매일처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들을 전해 듣고 우리 사회 안의 여러 안타까운 일들을 목도하면서,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에게 묻는 진실되며 쇄신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이제 ‘사회적 영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게 됩니다. 이 표현이 단순히 신학적 수사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답게 살아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다만 ‘사회적 영성’이 표어나 추상적 개념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상상력 안에서 구체화되고, 우리의 정서와 마음을 담는 살아있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영성’에 대한 진실하면서도 섬세하고 사려 깊은 형상화를 필요로 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 대한 탐구라는 영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영성’을 살아있는 인물들을 통해 잘 구현해주고 있기에,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매우 시의성을 지닌 영성의 구원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는 감상주의를 애써 피하면서도 진정한 연대감의 정서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존중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사회적, 경제적 상황의 엄혹성을 가감 없이 그려내면서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은 어떠한 경우에도 유보될 수 없고 부정될 수 없음을 깊이 확신하는 희망과 믿음을 가르쳐줍니다.
■ ‘자전거 탄 소년’이 보여주는 인생의 길
다르덴 형제의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을 처음 보고 나서 그들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사실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한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만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 여주인공이 그 너그러움과 선의와 단호함과 현명함에 있어 너무 이상화된 유형이 아닌가 하고 묻게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여러 번 볼 기회를 가지면서 다르덴 형제는 그저 비현실적 소망을 투사하는 한편의 동화가 아니라 인간이 실지로 걸어가야 하며 걸어갈 수 있는 길을 각고의 노력으로 선택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선사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독들의 마음은 간절하고 그들의 눈길은 정직하면서도 따뜻합니다.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고아원에 수용된 채 이미 어린 나이에 파괴적인 절망과 폭력성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소년 시릴과 일일 위탁모로서 봉사 차원에서 소년을 돌보다 아예 소년의 가족이 되어주기로 결심하는 미용사 사만다의 일상과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감독은 매우 정확하고 미화 없이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만다가 소년을, 적지 않은 희생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결단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소년이 사만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또 나름의 방식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주체로서 성장하는 가능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매우 실감 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물들의 선택과 관계는 여하한 경우에도 도식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만다가 이상적이고 경탄할 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다다를 수 없다는 의미의 이상형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 역시 시도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구체적 모범이라는 의미에서의 이상형이라 할 것입니다. 선의를 지니고 확고한 결심을 하고 책임을 지닐 때, 우리 역시 어느 정도는 사만다와 같이 연민과 연대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우리는 영화를 보며 갖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 바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천사’가 되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영성’에는 환상 없이 사회적, 경제적 구조와 조건을 비판하고 통찰하는 용기도 필요로 하지만, 결국은 희망을 지니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한껏 연대와 연민의 손길을 내밀려고 하는 선의에서 꽃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 마지막에 소년은 자신의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에게 보여진 선의에 응답하기 시작합니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고,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힘있게 자전거 페달을 딛고 가는 소년의 등 뒤로 감독은 위로와 용기를 담아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이 남긴 가장 숭고한 멜로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의 2악장 ‘아다지오 운 포코 모소’를 거장인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의 피아노 연주와 지휘자 버나드 하이팅크 지휘의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로 흐르게 합니다. 이 음악은 동시에 현실의 어려움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따스한 눈길과 손길로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천사’가 되라는, 우리를 향한 초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