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경 혜화동성당 조각물 작업 현장에서. 왼쪽부터 최만린, 장발, 김세중, 송영수.
김세중 선생은 우리나라 조각가 제2세대에 해당한다. 그는 해방 이후 설립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제1회 입학생으로 윤승욱, 김종영 선생 등에게서 배웠고, 24세 나이에 서울대 교수에 임명, 이후 서울대 미술대 학장과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을 역임하면서 명실공히 해방 이후 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조각가로 남아 있다.
미술대 입학 이후 그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을 주었던 교수는 장발(루도비코)이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장발 선생은 김세중 선생에게 미술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도 크게 영향을 주었고, 그를 가톨릭교회로 이끌어 대부도 되었다. 김세중 선생이 일생에 거쳐 종교 조각을 탐구했던 것도 장발 선생의 영향이 컸다.
김세중 선생의 데뷔작은 1949년 대학생 신분으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해 특선을 한 ‘청년’이었다. 이어 1950년 종교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유학 수속을 밟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일단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54년 서울대 전임강사로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김세중 조각의 결정체는 무엇보다 종교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미술은 한국교회가 창설되고 여러 시각 형상이 제작되면서 시작했다. 초기엔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 미술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여러 성당 건축이 들어선 이후부터였다. 장발 화백은 여러 의미에서 교회 미술의 선구자였고, 그가 학장으로 있던 서울대 미대는 김세중뿐 아니라 윤승욱, 김종영, 이순석 등의 교수들이 모두 가톨릭신자였으므로, 당시 서울대는 종교미술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세중 선생의 종교 조각에 대한 열정은 그가 초기부터 여러 종교 작품을 제작한 점에서도 나타난다. 1954년 그가 26세 나이에 제작한 한복 입은 ‘골룸바와 아그네스’는 성인 자매이다. 이 작품은 1954년 열린 ‘성미술전’에 출품됐고 1983년에 다시 한 번 ‘두 여인’이란 이름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의 종교 조각을 보면, 당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중세 유럽의 교회 조각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울 혜화동성당 조각의 하나인 ‘순교자상’은 신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려 했던 중세 조각과 유사하다. 또 혜화동성당 ‘최후의 심판도’에 종교적 도상을 정확하게 사용한 사실을 통해 그가 서양 종교 미술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세중 선생이 가장 많이 남긴 종교적 주제의 하나가 ‘성모자상’이다. 1980년 위 수술을 한 후 그는 조형물보다는 종교적 주제에 더 매달렸다. 특히 이상주의와 사실주의가 아름답게 융합한 르네상스 종교 미술보다는 오히려 약간 경직되고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중세 종교 이미지에 바탕을 두면서, 우리나라 초창기 그리스도교 미술 양식과 도상을 성립시키고 그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세중 선생은 약 1000점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다. 또 ‘유관순 동상’, ‘유엔 참전 기념탑’ 등 상당수의 동상과 조형물을 제작해 공공 조각 부문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대한민국 아이콘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주요 조각이 서양 조각의 여러 모티브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해, 좀 더 한국적 전통에서 아이디어를 찾았다는 점이다. 서양의 경우 장군의 동상은 주로 기마상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순신 장군의 우뚝 선 자세는 오히려 조선 시대 능묘의 무관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골룸바와 아그네스’, 1954, 청동, 국립현대미술관.
김세중 선생은 미술 행정인으로서도 매우 바빴다. 그는 작품뿐 아니라 교육, 행정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던 제2세대의 리더였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맡았던 당시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세대는 운명적으로 작품에만 몰두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졸업하자 후진을 가르쳐야 했고, 단체를 이끌어야 했고, 국가의 문화 행정에도 참여해야 했던 세대지요. 내가 지금 맡고 있는 현대미술관 관장직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가 지나가면 다음 세대는 각자 자기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젊은 작가들이 부럽습니다.”
이후 김세중 선생은 위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는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했지만, 앞으로 더 살 수 있다면 나의 예술, 나의 조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의 이러한 희망은 많은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1986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준공을 독려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케일 크고 묵직했던 인품과 리더십 덕분에, 한국 조각계의 거목으로 많은 미술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김영나 교수(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여대 교수, 서양미술사학회 회장,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