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어려움을 가져오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쩔 수 없이 용서가 안 되는 건가? 그게 아니라 혹시 용서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가?
마태오 복음 18장 끝에 보면 ‘매정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임금에게 그 빚을 탕감받고 나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그를 감옥에 가두지요. 그리고 이 매정한 종의 처사가 임금의 귀에 들어가고, 화가 난 임금은 다시 그에게 만 탈렌트의 빚을 다 갚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기 이전에 이미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을 기억할 때 아무래도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이 좀 수월해지겠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 할 때, 우리가 그것을 살아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고을에서 소문난 죄인인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다가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리지요. 어느 날 이 부분을 가지고 기도를 하다가 그게 무척 궁금했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그 여인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뭐라고 쓰여 있지는 않지만 감사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바라보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사랑을 드러내고 나서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도 감사해서 뭐라도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서 사람들의 시선 같은 것은 의식하지 않고 시몬의 집에 들어와서 예수님께 그렇게 해드렸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인 시몬을 더 사랑하셨을까요? 아니면 고을에서 소문난 죄인인 여자를 더 사랑하셨을까요? 둘 다 똑같이 사랑하셨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인 여자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시몬이 더 적게 사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죄인인 여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아냈던 반면에 시몬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것을 사는 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받았으면 살아라. 사는 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하는 것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