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 기적 예비 심사 종료 -현양 운동 이끌어온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
“저는 심부름꾼일 뿐, 모두 하느님 계획입니다”
진천본당 주임 시절 최양업 신부 알게 돼
자료수집·연구하며 시복시성 운동 주도
“목자 없는 양들 위한 ‘찾아가는 사목자’
귀감 되는 훌륭한 형님 사제와도 같아”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인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기적 예비 심사가 마무리됐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6월 15일 최양업 신부의 기적 심사 법정을 종료하고 이 기적이 최양업 신부의 전구로 발생한 것임을 확인했다. 최양업 신부 기적 심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기적 심사였다.
서류 운반자 시복시성특위 총무 류한영 신부는 6월 17일 시성성을 찾아 기적 심사 문서를 제출했고, 교황청 시성성은 한국교회에서 제출한 자료를 바탕으로 본심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희중 대주교와 장봉훈 주교 등 주교회의 대표단은 6월 21일 교황청 시성성을 방문해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을 만나 면담했다.
최양업 시복시성운동은 1976년 당시 진천본당 주임이던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시작했다. 이후 장 주교는 40여 년 동안 최양업 신부를 한국교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한국교회 최초의 증거자 시복이 임박한 가운데, 본지는 최양업 신부 현양운동을 시작하고 이끌어온 장봉훈 주교로부터 그동안의 활동과 소회,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다.
“너무나 기쁩니다. 가슴 벅찬 감격의 날입니다. 어서 빨리 이 기적이 시성성의 심사를 통해 명확하게 공인되고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지난 6월 15일 최양업 신부 기적 예비 심사가 마무리되자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말했다. 장 주교는 한국의 첫 사제이자 순교성인인 김대건 신부에 묻혀있던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를 한국교회사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장 주교와 최양업 신부의 인연은 갓 사제품을 받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 주교의 첫 소임지는 진천본당이었다. 그해 12월, 장 주교는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당시 진천본당 관할이던 배티공소를 방문했고, 공소 신자들과 식사를 하던 중 최종선 공소회장(베네딕토)으로부터 배티에 최양업 신부가 지냈던 집이 있고 성당을 겸해 기도했던 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근방의 무명 순교자 묘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배웠는데, 최양업 신부는 처음 들었어요. 민망하고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분에 대해 알려고 한국교회사연구소와 가톨릭신문사 등을 방문해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지요. 이 과정을 통해 최 신부님을 알게 됐어요.”
모은 자료를 통해 최양업 신부는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생이었고, 두 번째 사제로 11년 6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사목한 사목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장 주교는 이 사실을 당시 청주교구장이던 정진석 추기경에게 보고했고, 그해 11월 청주교구 대학생연합회가 배티를 도보순례하며 처음으로 공식 현양행사가 열렸다. 이후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 2명이 파견되어 배티 성역화 작업이 시작됐다. 이렇게 장 주교와 최양업 신부의 첫 인연이 시작됐다.
두 번째 인연은 1994년 장 주교가 배티성지 초대 담당 신부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청주교구 사제회의에서 배티성지 전담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장 주교가 자원한 것이다. 이후 장 주교는 본격적으로 최양업 신부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역사에 기초해 최양업 신부를 제대로 알고, 초기 한국교회에서 최양업 신부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배티와의 관련성을 규명하기 위해 주력했다. 1996년부터 97년까지 이 작업의 일환으로 「최양업 신부의 서한」,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등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4권이 간행됐다.
최양업 신부의 활동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장 주교는 최양업 신부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장 주교는 “최양업 신부는 찾아가는 사목자로, 18개의 편지가 번역되며 감동적인 그분의 삶과 신앙이 알려지게 됐다”면서 “나에게는 귀감이 되는 ‘형님’ 사제이자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릴 가치가 있는 훌륭한 사제”라고 말했다.
장 주교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5년)로 완전히 초토화된 한국교회를 땀으로 다시 세우신 분이 최양업 신부였다”면서 “목자 없는 양 상태로 전국에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와해된 교회를 되살려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사는 순교자 중심의 사관입니다. 하지만 순교자가 나오려면 신앙 없이는 안 되죠. 병인박해 당시 1만여 명이 순교를 했는데, 이들에게 신앙의 씨앗을 심은 분이 바로 최양업 신부입니다. 최양업 신부를 통해 한국천주교회 신앙의 꽃이 핀 것이지요.”
이어 장 주교는 1996년 7월 배티성지 담당신부로서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정진석 추기경에게 제출했다. 최양업 신부 라틴어 서한을 번역하기도 했던 정 추기경은 주교회의에 그해 가을 정기총회에서 최양업 신부 시복을 안건으로 제출했다. 이후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지난 40년 세월, 장 주교의 노력과 함께 최양업 신부는 이제 한국교회 전체에 잘 알려졌다. 심지어 교회 행정 시스템 명칭이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본 따 양업시스템으로 지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장 주교는 자신이 한 일은 별로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과 관련해 내가 한 것은 별로 없어요. 하느님의 작은 심부름꾼일 뿐이었어요. 때가 되어 최양업 신부님을 드러내고 싶으신 하느님의 계획에 따랐을 뿐이죠.”
장 주교는 최양업 신부가 2021년이면 시복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장 주교는 “다들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다”면서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고 하신 일”이라고 말했다.
이제 최양업 신부의 시복은 시성성으로 공이 넘어갔다. 장 주교는 최양업 신부의 조속한 시복을 위해 계속해서 신자들의 기도를 요청했다.
장 주교는 “시성성의 본심사는 여간 엄중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한국에서 심사한 기적이 빠른 시일 내에 기적으로 판명이 나고 계속해서 관련 기적이 일어나 탄생 200주년인 2021년 시복될 수 있도록 신자들의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