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창간 90주년을 맞는 가톨릭신문이 6월 26일자로 지령 3000호 지면을 발행했다. 일제의 억압을 받던 1927년 4월 1일, 평신도 청년들의 자발적인 뜻에 힘입어 월간 ‘천주교회보’로 시작된 가톨릭신문은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 민족과 교회의 역사를 함께해온 역사의 증인이다. 3000번에 걸쳐 발행해온 가톨릭신문의 지면 구석구석에는 민족과 국가와 함께해온 교회의 모습들, 세상과 교회 안에 머물면서 우리의 고통과 환희를 함께 겪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 그리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언론 사도직을 충실하게 수행해온 가톨릭신문의 피와 땀이 어려 있다. 지령 3000호를 기념해, 가톨릭신문이 우리 민족과 교회와 함께 격동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어떻게 선포하고 증거해왔는지를 살펴본다.
지난 20세기, 근현대 100년은 세계와 한국, 국가와 사회와 교회 모두에게 유례없는 격동기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복음의 씨앗이 미처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기도 전에 만난 박해의 터널을 지나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교회는 가까스로 얻은 신앙의 자유를 바탕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꾸준한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땅, 그 혹독한 탄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다시금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마침내 광복, 하지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또 다른 비극의 운명에 처해진다. 허리가 잘린 조국에서 교회는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독재에 대항해 투쟁에 나서야 했다.
그 와중에도 한국교회는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명실상부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1930년 불과 10만 명에 불과했던 교세는 1974년 말 100만 명을 돌파했고, 1985년 말 200만 명, 1992년 말 300만 명, 대희년인 2000년 말에는 400만 명, 그리고 2009년 말에는 복음화율 10%돌파로 총 신자 수 512만 92명을 기록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과 함께 103위 순교자가 성인으로 탄생했고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통해 세계 각국 교회로부터 주목받았다. 전후 원조를 통해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던 한국 천주교회는 국가 경제의 성장, 늘어난 신자 수에 힘입어 ‘받는 교회’로부터 ‘나누는 교회’로 성장했고, 이제는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제삼천년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는 비록 성장통에 시달리며 또 다른 쇄신의 요청을 받고 있지만, 20세기 이후 쇠퇴 일로를 걸어온 서구교회에 비해 여전히 생생한 신앙적 활력을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보편교회의 미래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아시아, 특히 중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복음화에 있어서 교두보로서 전 세계교회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천주교회보’의 창간
“本報는 左의 세 가지 要求에 應하야 出生하였으니 一은 南方敎區내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대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 1927년 4월 1일자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中에서)
창간 당시 한국 인구는 1900만 명, 경성과 대구, 원산 등 3개 교구 신자 수는 11만 명이었다. 4월 1일자로 대구지역 청년들이 월간지로 펴낸 천주교회보는 거의 만용에 가까운 열성이었다.
■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삼천리강산 이 땅에 진리의 빛 천주의 복음이 전한지 1백48년이오 조선교구가 설정된지 백년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긔념하고 축하하며 천주의 진리를 사해에 외치노니 모든 이는 다같이 즐겨 용약하라.”(1931년 10월 1일자)
■ ‘천주교회보’의 복간
“16년 자던 꿈을 홀연히 깨고 보니 나라도 새 나라요 목자도 새목자시다. 감개도 무량하려니와 희망도 한이 없다. 갈길이야 멀지라도 갈림길이 있겠는가. 一왈 소식보도요 二왈 보조일치요 三왈 조국성화(聖化)다.”(1949년 4월 1일자)
1933년 이후 16년 동안 쉬고 있던 천주교회보를 복간, 사시에 조국 성화를 추가했다. 광복과 분단의 격동 속에서 교회는 새로운 소명을 꿈꾸었다.
■ 한국 전쟁
“敵軍의 侵入으로 말미암아 慘酷한 변을 당하신 모든 戰災교우들에게 대하여 本 主敎는 哀痛한 同情의 눈물을 禁치 못함과 동시에….”(1950년 11월 10일자)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회보는 다시금 5개월 동안 휴간하다 11월에 복간됐다. 전쟁의 상처와 고통, 외국의 원조 상황 등이 상세하게 실렸다.
■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
근현대 세계의 변화는 교회가 사회 문제에 직접 관심을 가질 것을 요청했다. 국내에서는 1956년 5월 15일 총선을 앞두고, 그리스도인 역시 선거 등의 정치적 행위에 참여해야 함을 피력했다. 이에 따라 5월 16일 ‘가톨릭시보’는 2면 “병든 민주주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신앙 깊고 학식 넓은 장면 박사를 부통령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적극적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 선거법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다.
■ 4·19 의거
“학생 의거 사건이 벌어지자 학생회 지도 신부인 나상조 신부와 동성중학 지도신부였던 최석호 신부, 그리고 가톨릭 대학 지도신부이며 전학생회 지도 신부였던 박호안 신부는 쏟아지는 총탄 속으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활약해 많은 영혼들에게 마지막 위로를 주는 한편, 천국에로 인도했다.”(1960년 5월 1일자)
4·19로 희망을 꽃피운 민주주의는 이듬해 5·16 쿠데타로 짓밟혔다. 이후 가톨릭시보에서는 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고, 면마다 ‘전면 군검필’이라고 적혀 있다.
■ 산아제한, 모자보건법 반대
“정부는 국민 우생법을 마련하고 곧 국회에 제의할 단계에 있다고 듣고 있다. 우생법이… 노리는 바는 산아제한운동을 법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임신중절을 위한 산과의(産科醫)들의 낙태를 공인하자는데 있다.”(1964년 3월 15일자)
이후 낙태 반대 운동은 교회 생명운동의 가장 핵심적 과제였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평화 속에 뭉치고 평화 속에 전진하라 - 8일 역사적 폐막
교종 바오로 6세는 8일 현대 가톨릭교회의 좌표를 정하고 새로운 세기의 문을 연 역사적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폐회하면서 이번 공의회가 노력한 바는 비단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전 인류 세계를 새로운 성신강림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라고 언명했다.”(1965년 12월 12일자)
1962년 개막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관해, 한국교회의 유일한 교회 언론으로서 개막부터 폐막까지 전 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해설함으로써 한국교회에 공의회 정신을 알렸다.
■ 한국교회 첫 추기경 탄생
“김수환 대주교 한국 최초 추기경에 - 수난 얽힌 2백년사의 결실
교황 바오로 6세는 28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47세) 대주교를 추기경(카르디날)으로 임명, 1백92년의 한국교회사상 최대 영광의 座를 한국에 부여했다.”(1969년 4월 6일자)
3월 8일 한국교회 최초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추기경에 임명됐고, 서임식이 4월 28일 교황청에서 거행됐다.
■ 지학순 주교 구속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12일 내란선동 및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피의사건 선고 공판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로부터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1974년 8월 18일자)
8월 12일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됐다. 이는 197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진 교회의 사회정의 구현과 인권 수호를 위한 투신으로 빚어진 일이었다. 이로 인해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고, 이후 정부와 교회는 끊임없이 민주화의 현장에서 부딪히게 된다.
■ 광주, 침묵으로 시작된 80년대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인간적 충돌은 저지돼야 한다’고 천명,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자’고 촉구했다.”(1980년 6월 1일자)
처음으로 광주 민주항쟁이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5월 25일자부터였다. 하지만 참담한 비극에 대한 예언자적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강요된 침묵과 절망 속에 빠져들어 갔다.
■ 103위 시성식 등 대규모 종교집회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를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하여 서인들 명부에 올리노라. 1984년 5월 6일 여의도에서 거행된 한국순교복자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을 선언함으로써 한국순교복자 103인은 드디어 성인으로 공식 선포됐다.”(1984년 5월 6일자)
1981년 10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1984년 200주년, 그리고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 연이은 대규모 종교 집회는 국내외에 한국 천주교회의 저력과 위상을 과시한 행사들이었다. 특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두 차례에 걸친 방한은 각별한 의미를 가졌다.
■ 북한 땅에서 분단 후 40년 만에 첫 미사
“분단 40년 만에 9월 22일 종교가 말살된 북녘땅 공산치하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미사성제가 봉헌됐다. 남한의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미사를 집전한 지학순 주교는 미사 중 강론을 통해 ‘1945년 해방 직후 모든 성직자들이 순교하여 40년간 미사성제가 없었던 평양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집전하게 돼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1985년 9월 25일자)
■ 박종철 고문치사부터 6·29선언까지
1987년 5월 18일 ‘5·18 광주 항쟁 희생자 7주기 추모 미사’를 마친 후 정의구현사제단은 1월 14일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범국민적 저항이 불붙었고, 6·10 국민대회를 거쳐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항복 선언을 했다.(1987년 1월 25일자, 2월 1일자)
■ 안중근(토마) 의사 의거 현양
“일제 수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 일제치하의 제도교회에 의해 단죄됐던 안중근(토마) 의사가 84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의 공개 사과로 의거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8월 21일 오후 6시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성당에서 봉헌된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는 안 의사 의거의 정당성을 기원하는 3백여 명의 신자들과 학계 인사들이 참여, 안의사의 의거를 현양했다.”(1993년 8월 29일자)
■ 은총의 대희년… 새날 새삶 운동 펼쳐
2000년 대희년을 지내면서 한국교회는 생활 실천 운동으로서 새날 새삶 운동을 펼치고, 특히 한국교회의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를 발표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신앙으로 결합된 형제자매로서,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함께 고백하고 참회한다. “이러한 참회를 바탕으로 자신을 쇄신하면서 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 하려 한다.”(2000년 3월 12일자)
■ 황우석 박사 과학 사기극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 안에서 윤리적인 측면에 대한 거의 아무런 고려도 성찰도 없다는 것이다. 큰 사회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사회의 생명의식 상실을 개탄하곤 한다. 가장 미소한 인간 생명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이런 사회 풍토 안에서 국민들의 생명의식이 살아있으리라고 어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2005년 5월 29일자)
■ 복음화율 10% 넘어, 신자 수 500만 시대
주교회의가 2010년 5월에 발표한 한국천주교회통계에 의하면, 2009년 말 현재 천주교 신자 비율이 10.1%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반도에 신앙이 전래된 이후 국내 총인구 대비 신자비율이 10%를 넘어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1930년 불과 10만 명에 불과했던 교세는 1974년 말 100만 명을 돌파한 뒤, 빠른 속도로 높아졌다.(2010년 6월 13일자)
■ 프란치스코 교황 탄생
13일 오후(로마 시간) 최초의 예수회 출신이자 미주 지역 출신 첫 교황이 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Jorge Mario Bergoglio·76세·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의 첫 마디는 “보나 세라(Buona sera·이탈리아 저녁인사)”. 광장의 인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그의 따뜻한 첫인사였다.”(2013년 3월 18일자)
■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과 세월호 참사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4~18일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교회는 교황의 방한이 한국 천주교회의 상당히 세속적인 자부심과 긍지를 높여줄 것이며, 90년대 들어 침체 일로의 교세 증가율을 수직 상승시켜 줄 것으로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교황은 한국 땅에 위로와 격려, 특히 세월호 참사로 깊은 시름 속에 잠겨 있는 국민들을 따뜻하게 위로함으로써 교황 방한의 참 의미를 일깨웠다.(2014년 8월 24일자)
■ 본사, 신더셔·UCAN과 업무협약
“가톨릭신문사(사장 이기수 신부)가 중국 최대의 교회언론사 신더셔(信德社, Faith Press)와 역사적인 첫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양사는 정보교환 네트워크 구축과 학술대회 개최에 전격 합의하고 중국 대륙을 포함한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2015년 11월 29일자)
가톨릭신문사는 이어 2016년 3월 18일 아시아가톨릭뉴스(Union of Catholic Asian News, UCAN)와도 업무협약을 맺음으로써 아시아 복음화를 향한 발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됐다.
■ 뉴미디어, 가톨릭e신문 창간
“가톨릭신문이 창간 89주년을 맞은 4월 1일부터 새로운 미디어를 선보인다. ‘디지털 3.0시대’에 맞춰 종이신문과 디지털 융합 매체인 ‘가톨릭e신문’을 창간했다. 오늘날 빠르게 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최적화한 뉴미디어로 한 단계 진화한다. ‘가톨릭e신문’은 PC, 모바일에서 편리하게 종이신문 지면을 볼 수 있는 디지털 신문이다. 종이신문 한계를 벗어나 언제 어디서든 지면을 볼 수 있도록 서비스한다.”(2016년 4월 3일자)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