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본당의 역사를 따라] 평택대리구 정남본당
전교에 힘쓴 공동체… 공소 시절 신자 수 600여 명 달해
공소 때부터 레지오·소공동체 등 시작
본당 설립 후 이농현상으로 봉사자 줄어
재교육·신심단체 활성화 등 다방면 노력
평택대리구 정남본당(주임 김우정 신부)은 공소시절부터 공동체의 일치로 지역 복음화에 힘써온 본당이다.
본당 관할 지역에 최초로 공소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937년의 일이다. 당시 왕림본당 주임신부는 정남면 백리에 자리한 이 공동체에 말을 타고 왕래하면서 성사를 집전하곤 했다. 공소는 나날이 성장했다. 1940년에는 정남면 신리에도 공소가 세워졌고 이 신리공소가 본당의 모체가 됐다.
공소회장의 집에서 공소예절과 춘추판공을 해오던 공소공동체는 전교에 힘써 많은 이들을 신앙의 길로 초대했다. 1943년에는 초가 강당을 건축해 사용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는 증가하는 신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신자들은 1962년 새 공소강당을 마련하고 신앙생활에 박차를 가했다.
공동체는 비록 공소였지만 본당과 다름없는 활동을 펼쳤다. 1967년에는 이미 당시 작은 본당의 신자 수에 버금가는 600여 명의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1969년에는 버스를 전세 내어 미리내성지 순교자현양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레지오 마리애 남녀 혼성 쁘레시디움인 ‘모든 성인의 모후’를 설립했다. 또 각 부락별로 여회장을 임명해 본당 소공동체와 같은 조직체계를 갖추고 전교에 힘쓰기도 했다.
1971년에는 공소의 도약을 위한 공소신자 총회를 열었다. 이에 공소는 본당 승격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로 하고 성당 부지를 마련해 나갔다.
본당 승격을 향한 공소의 염원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4년 공소 신자 총회를 통해 본당 승격을 간원하는 진정서를 교구청에 전달했던 것이다. 선의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방법이 온당치 못하다는 이유로 교구장에게 2개월간 단식재를 지키도록 견책을 받기도 했다.
견책을 받기는 했지만 그 마음은 잘 전달됐는지 1975년 5월 15일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본당은 공소강당으로 사용하던 성당을 증축하고 종탑을 세우고 주보성인을 ‘요한 세례자’로 삼았다.
하지만 본당은 설립 초기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아야 했다. 관할 지역이 농촌지역이라 신자들이 생활하는 지역이 넓게 산재돼 있고, 이농현상이 점차 가속화돼 봉사자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당은 지속적인 신자 재교육과 신심단체 활성화로 이런 어려움을 이겨냈다. 본당 5대 주임을 역임한 현임 교구장 이용훈 주교 역시 신자들의 신앙심을 위한 여러 교육과 행사를 실시한 바 있다.
1985년에는 본당 신자 수가 처음으로 1000명을 돌파했고, 본당 출신 성소자가 나기도 했다. 1998년 지금의 성당을 봉헌한 본당은 1032명의 신자와 함께 지역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