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 새터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36년 15세 나이에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 신부는 그해 말부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과 함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중국 강남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중국 요동 지방에서 사목하다 12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최양업 신부는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000 여 리를 걸어 다니면서 3815명의 신자들을 만났다. 이후 충청도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았다.
최 신부의 사목 활동은 이후로도 11년 6개월 여간 계속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해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다. 신학생들을 선발해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도 수집했다.
배티성지에 있는 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교회 기록과 전승에 따라 옛날 그 자리에 복원했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돼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길을 헤맨 적도 있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에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어진 채 지내야만 했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겹쳐 앓다가 1861년 6월 15일 배티 인근에서 선종했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배론성지 최양업 신부의 묘소.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