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종신부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요.” 만으로 꼭 19년, 햇수로 20년 군사목을 마치고 6월 30일부로 전역하는 김태진 신부(군종교구 상승대본당 주임, 중령)는 지나온 군종신부 생활에 대한 소회를 묻자 ‘먹고 살기 힘들었다’는 말부터 꺼냈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하루 삼시세끼 제때 차려 먹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군종신부는 민간본당 신부들과 달리 스스로 밥을 차려 먹어야 합니다. 점심이야 일과 시간 중에 소속 부대 식당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침, 저녁은 매 끼니마다 뭘 먹을까 걱정합니다. 밥을 차려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누나들이나 본당 성모회 회원들이 반찬은 만들어서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밥은 제가 직접 해서 먹었습니다.” 생활이 이렇다 보니 김 신부가 가장 애용했던 음식은 라면이었다. 시간 안 들이고 간편히 요리할 수 있어서다. 편의점 도시락도 주메뉴였다. “군종신부들이 피정이나 연수를 좋아하는 이유도 피정이나 연수 기간 중에는 밥걱정을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김 신부는 올해 군종교구 전역 신부 15명 중 최장 복무자다. 스스로 먹고 살기 힘들었다고 밝힌 생활을 청춘을 통째로 바쳐가며 19년씩이나 했다는 것이 의아스럽기도 하다. 1994년 2월 원주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 신부는 원주 태장동본당 보좌로 1년, 용소막본당 주임으로 2년간 봉직하다 1997년 7월 육군 대위로 임관하면서 군종신부의 길에 들어섰다.
“제가 원해서 군종신부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주교구 사제서품 동기 4명 가운데 제가 생일이 가장 늦어서 관례에 따라 입대했지요. 제가 입대할 때만 해도 자원해서 군종신부가 되는 사례는 드물었고 나이순, 나이가 같으면 생일순으로 입대자를 결정했습니다. ‘어떤 황무지에서도 내 역할을 일궈내겠다’고 다짐했지만 군대는 다시 오기 싫은 곳이었고 처음에는 장기로 군종신부 생활을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김 신부는 군종장교 임관 뒤 첫 부임지였던 경기도 양평 제20기계화보병사단 결전본당에서 군인 간부 사목회장을 만나면서 군종신부에 대한 전혀 다른 인식을 갖게 됐다.
군종장교 임관 전 병사로 군복무를 이미 마친 김 신부는 결전본당 사목회장에게 “우리나라 군대에서는 병사들만 고생하지 간부들은 병사들에게 힘든 일 다 시키고 하는 일이 뭐가 있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이에 대해 사목회장이 “군 간부들은 아침에 전투화 끈을 묶으며 목숨을 나라에 바칠 각오를 하고 저녁에 하루 일을 무사히 마치면 감사 기도를 드린다”고 답했다. 김 신부는 “군인들의 정신이 이렇다면 같은 배를 타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후 19년간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파병을 포함해 수도방위사령부(방패본당), 제1군단(성요셉본당), 육군사관학교(화랑대본당) 등 무려 12개 부대에서 장병들과 동고동락하며 군복음화와 신앙전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장기 복무 뒤 전역하는 군종신부는 마지막 2달 정도는 휴가로 보내기도 하지만 김 신부는 군과 군종교구에서 부여받은 소임을 다하느라 6월 30일부로 전역하고도 7월 3일 주일미사까지 상승대본당에서 봉헌하고 군을 떠난다. 그만큼 군인신자들을 향한 마음이 애틋하다.
김 신부는 일선 부대에서 만난 수없이 많은 병사들 가운데 특히 잊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부대에 적응을 못하던 한 병사가 탈영해서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병사와 만나 고충을 들어주고 제가 소속 부대에 전화를 걸어 ‘군종신부와 상담하고 있으니 상담 끝나고 부대로 보내겠다’고 상황을 설명해 그 병사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선처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살하려는 병사를 살린 일도 있다. “전산병으로 입대한 병사가 자기 주특기를 인정받지 못하자 자살까지 시도했고 군종목사, 법사와 상담을 했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자 결국 저와 상담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부대에 요청해 그 병사는 자기 주특기를 살려가며 성당에서 두 달 동안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제가 왜 죽습니까’라고 반문할 정도로 회복이 돼 있었습니다. 군종신부로서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김 신부는 사제이자 군인인 군종신부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명확한 견해를 밝혔다. “신부로 사목하기 위해 입대한 것은 분명하지만 군대 내 공식적인 관계에서는 군인이고 상급자에게 하급자로 대우받을 수 있는 곳이 군대입니다. 신부여야 하는 때와 군인이어야 하는 때를 구분하지 못하면 부대와 갈등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공적인 자리에서 상급자를 존중하면 성당이나 사적 자리에서는 군종신부로 상응한 대우를 받게 돼 있습니다.”
김 신부가 후배 군종신부들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 “최근 들어 자원해서 군종신부가 되는 비율이 높아졌고 제가 입대할 때에 비하면 요즘 군종신부님들은 정말 열심입니다. 군 장병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후배 군종신부님들에게 어느 부대에서도 재밌게 살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지난 3월 김태진 신부가 군종신부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용사들과 함께하는 미사’ 모습. 김태진 신부 제공
2000년 동티모르 상록수부대에 파병 간 김태진 신부(맨 오른쪽)가 종교센터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김태진 신부 제공
2007년 전방부대 위문에서 훈련중인 장병들과 함께한 김태진 신부(뒷줄 오른쪽 첫 번째). 김태진 신부 제공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