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조각가 김세중(3)
“진리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구도적 과정 담아”
숭고한 종교적 주제를 형상이 아닌
형태와 질감, 구조, 상징으로 구현
‘최후의 심판도’, 1960, 화강석, 서울 혜화동성당.
2006년 3월 2일 문화재청은 서울 혜화동성당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고 발표했다. 선정 이유로 “혜화동성당은 건립 당시 고딕양식으로 정형화돼 있던 가톨릭 성당의 건축 틀을 깬 새로운 건축물로, 50년대 후반부터 건축되는 성당 건축의 모형이 될 정도로 기념비적인 건물”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의 설명처럼 이 성당의 건축 양식은 전형적인 교회 건축의 틀을 벗어났는데, 이러한 건축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 건축 정면의 큰 벽면을 차지하는 대형 부조이다.
이 부조는 당시 서울대 미대 학장이자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장발 선생의 감수 아래 김세중 선생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미술 기록에 따르면 “초기 설계 때는 정면 부조를 기획하지 않았으나, 설계를 확정하는 최종 단계에서 추가하기로 결정했는데, 180여 개의 화강암 조각에 새겨진 이 부조는 김세중이 원도를 작성하고 송영수와 최만린이 협력해 먼저 흙으로 만든 뒤 김세중과 장기은이 직접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부조는 교회미술의 도상학을 충실하게 반영해 만들어졌고, 낮은 돋을새김으로 제작됐지만 빛을 받아 음영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화강암 특유의 질감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부조가 새겨진 벽면으로부터 약간 후진해 솟은 종탑의 붉은 벽돌로 마감한 벽에는 이 본당의 주보성인인 베네딕토 성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 부조 역시 김세중 선생의 작품이다.
‘최후의 심판도’나 ‘성 베네딕토’의 조형적 특징은 김세중 선생의 부조 작품 특유의 단순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세부 묘사를 최대한 절제하고 작품의 내용을 암시하는 최소한의 형태만 표현함으로써, 선적이면서도 동시에 회화적인 특징이 강조된 김세중 선생의 조형 언어가 이미 1950년대에 구축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혜화동성당에는 청록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제대와 제대 십자가, 도자 벽화 뒤에 걸린 십자고상 등 김세중 선생이 제작한 종교 미술품들이 있다. 이런 점에서 혜화동성당은 김세중 선생의 종교미술을 볼 수 있는 작은 미술관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김세중 선생은 대학 재학시절에 이미 작가로 데뷔했다. 또 제2한강교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탑골공원의 ‘3·1운동 기념 부조’, 국립극장 분수 조각 ‘군무’, 장충동공원 ‘유관순 동상’,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 동상’, 국회의사당 ‘애국애족의 군상’ 등 기념 조형물 제작에 앞장섰고, 후기에는 예술 행정가로서 활동했다. 게다가 예순을 앞두고 타계해,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품 수가 적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단 한 번도 개인전을 갖지 않았지만 국전과 한국미술협회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고, 대학시절부터 제작한 작품을 포함하면 1000여 점에 이른다. 김세중 선생이 제작한 작품 중 상당수가 종교적 목적을 지닌 까닭에 전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발표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김세중기념사업회’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김세중 선생은 모교의 전임강사로 부임하던 1954년 벨기에 엑스포에 ‘마돈나’를 출품했다고 한다. 같은 해 서울 명수대성당(현 흑석동성당) 외부 ‘예수성심상’과 내부 ‘성모상’ 등을 제작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의 ‘평화의 모후’, 세종로성당의 ‘동정 마리아’, 절두산순교성지의 ‘순교기념상’과 ‘요한바오로2세 상’, 성라자로마을의 ‘새 삶의 예수상’, 불광동성당의 ‘예수상’, 춘천 죽림동성당 ‘성모자상’ 등 수많은 교회미술품을 제작했다. 절두산성지의 건립 때는 미술을 담당해 종탑 부조 순교자상과 함께 성당 대리석 제대와 감실을 제작했다.
김세중 선생의 종교 조각 중에서 예술적 성과가 뚜렷한 작품의 하나로 ‘골룸바와 아그네스’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김세중 선생은 숭고한 종교적 주제를 형상이 아닌, 형태와 질감, 구조, 상징 등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장식이 배제된 단아한 선과 하나의 덩어리로 완결된 인체, 죽음을 초월하는 정신의 승리를 보여주려는 듯 강직하게 처리된 얼굴과 마디가 분명한 손, 최소한의 주름 외에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한 의복 표현 등은 십자가나 나뭇잎 못지않게 이 작품의 상징성을 고양하는 요소다.
김세중 선생은 1984년 봄, 한 인터뷰에서 “그동안 내 작품은 초기의 극단적인 사실을 거쳐 조형적으로 요약하고 단순화하는 과정을 지나왔지요. 예술적 흐름에 대한 나의 해석과 수용에는 후회가 없었지만, 좀 더 정돈되고 결론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거의 종교 작품만을 만들 생각인데, 이 작품들을 통해서 나의 신앙과 삶을 결산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김세중 선생은 1980년 위 수술을 받고 여러 달 입원해 있는 동안 1960년 작 ‘그리스도의 얼굴’을 옆에 두고 늘 어루만지면서 병마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의 작업이 단지 심미적인 것의 추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 종교적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적 과정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그의 종교 조각 중에서도 비교적 사실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예수의 긴 얼굴과 지그시 감고 있는 눈에서 묵상, 종교적 초월, 신비 등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그가 남긴 수많은 종교 조각은 신앙 고백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김세중 선생은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바티칸미술관과 프랑스 외무부 및 문화부, 독일 퀼른대교구의 협조를 받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국제종교미술전’을 열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으로서 이 협회를 국제기독교미술인협회에 가입시켰고,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종교미술전’을 통해 한국의 가톨릭 미술 작품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전력을 기울여 추진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준공과 개관을 앞두고 1986년 지병과 과로로 인해 58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최태만 교수(국민대 미술학부)
제2회 김종영학술상과 제1회 조각평론상을 수상했고, 2014 창원조각비엔날레 예술감독 등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