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한 장면.
■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감독의 최근작 ‘내일을 위한 시간’(원제: Deux Jours, une Nuit)은 공황장애 및 우울증으로 보이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난 30대 중반의 조그만 공장 노동자, 주인공 산드라가 복직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남편과 함께 동료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이틀간의 고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공장 복직을 당연히 생각하고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산드라에게 동료 줄리엣이 전화로 심상치 않은 상황을 귀띔해줍니다. 회사가 산드라의 일자리를 없애는 대신 직원들에게 1000유로씩 특별수당을 주기로 약속했고 작업 조장이 주도해서 산드라의 동료들에게 이 제안을 수락하도록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결과 이미 16명의 공장 노동자 중 14명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며, 이에 관한 투표가 곧바로 있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산드라에게 무엇인가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산드라와 줄리엣은 함께 공장주를 찾아가고 그래서 그 투표를 주말이 지난 후에 하도록 허락받습니다. 이제 산드라에게는 다시금 동료를 설득하기 위한 ‘이틀의 날과 하루의 밤’이 주어지고, 영화의 원제목은 이를 의미합니다.
감독은 이러한 복직 투쟁에 임하는 여주인공이 원래부터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전사’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져 있는 연민이 필요한 이웃임을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배우 마리옹 코띠아르가 화장기 하나 없는 지쳐 보이는 얼굴로 나와 너무나 인상 깊게 소화해낸 산드라는 우울증에, 때로는 약물과용으로 인한 자살 유혹에까지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산드라는 그녀의 남편 마누의 조언과 격려에 힘입어 주어진 주말의 이틀 동안 최선을 다해 그녀의 동료들을 설득하는 어려운 여정을 해냅니다. 끝까지 그녀와 함께하고, 포기하려는 그녀를 위로하고 독려하는 남편 마누는 어떤 면에서는 영화에서 감독이 곤경에 처한 여주인공에게 보내준 ‘천사’처럼 보입니다.
동료들을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공격적이고 적대적 반응을 보였던 직장 동료들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그녀에게 호의적이고 동정적이었던 동료들도, 자신들에게 그 1000유로라는 보너스가 얼마나 긴요한지를 호소하며 오히려 그녀를 설득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함께해주는 남편의 굳건하면서도 현명한 사랑과 ‘동지애’에 힘입어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편함과 민망함, 모멸감 등을 이겨내고 끈기있게 동료들과 대면하고 논쟁하며 그들이 1000유로에 연대성과 동료애와 이웃사랑의 가치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스스로 확인케 하는 계기를 줍니다.
이를 통해 감독은 이 영화가 현재의 경제, 사회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이유 있는 분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개인이 일터에서 맺고 있는 연대성과 존중감, 동료애 등을 포기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는 힘 있는 이들의 민낯이 잘 드러납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황에서 각자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이기적 선택을 하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힘이 들지만 다시금 스스로 연대와 상호존중의 길을 발견해 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투를 보여줍니다. 산드라가 만나는 동료들을 묘사하면서 다르덴 형제는 결코 환상을 가지고 미화하지 않고, 기꺼이 보고 싶은 동화를 그려내지 않습니다. 각 사람들은 각기 나름의 약점을 지닌, 비겁하기도 하고 비정하기도 하며,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도 약한 이들이라는 것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됩니다.
단순한 호의만으로는 양심과 도의와 연민을 지켜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동병상련과 연대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때때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또한 이러한 자신의 이해와 생존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타인의 입장과 무엇보다도 자비와 정의의 원칙이 우선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개인들이 있다는 것을 힘있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양심의 작은 승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애쓰고 설득하며 투쟁하는 산드라 같은 사람이 있을 때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 결정적 식별 - 의지의 자유를 통한 연대성의 발견
산드라는 이틀 동안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주말이 지나고 벌어지는 투표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료들 중에서 몇몇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특별수당을 포기하고, 산드라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까스로 투표에서 산드라의 해고는 부결됩니다. 이익 대신 연대성을 선택한 개인들의 선의가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에 산드라를 우리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상황 속으로 인도합니다. 공장 사장은 산드라가 다시 일하게 된 것을 축하하면서, 다만 그녀의 복직을 허용하게 되었기에 불가피하게 비정규직 동료 한 명을 해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산드라는 이 짧은 결단의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또한 억울하게 직장을 잃게 된 그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선택을 합니다. 복직을 거부하고 주차장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잘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여운을 주면서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제 그녀의 투쟁은 다시 시작되겠고, 그녀의 주위에 그녀의 남편과 같은 이들이 더 많이 있기를, 그리고 그녀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에 영화가 끝날 때 마음은 먹먹하면서도 작은 희망을 감지합니다. 마지막에 산드라가 짧은 시간에 단호하게 내린 결정은 이틀 동안의 과정 없이는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결정적 식별의 순간을 위한 준비를 이틀 동안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해가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의 억울함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어려운 처지 역시 이해하고 연민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참된 보편적 연대성이 무엇인지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득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를 통한 자유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는 의지의 자유란 필연적으로 자기 인식과 자신의 바람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사회적 영성이란 각 개인이 이기적 욕심이나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행위하는 대신 자신의 의지를 인식과 성찰을 통해 보다 더 자유롭게 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실로 선택한 연대성의 행위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적 이웃사랑의 계명을 가장 탁월하게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 탁월한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